중동 특수가 불지핀 건설주 광풍…'묻지마 투자'의 대가는 컸다

입력 2018-09-07 19:03
수정 2019-12-24 17:52

“포항 영일만에서 석유를 발견한 것은 사실입니다.”

1976년 1월 15일. 한국 자본시장 사상 최대 낭보가 터졌다. 박정희 대통령이 새해 기자회견에서 소문으로만 떠돌던 석유 발견 사실을 시인한 것이다. 감격과 흥분의 물결이 온 나라를 뒤덮었다. 주식시장에선 사상 최다인 55개 종목이 상한가로 직행했다. 1973년 ‘오일 쇼크’로 허리띠를 졸라맸던 직장인들은 TV 앞에서 부둥켜안고 만세를 외쳤다. 저녁 식탁에선 교육비 걱정 없는 산유국의 이야기가 꼬리를 물었다. 그날 밤 떠오른 섣달 보름달은 유난히 크고 밝게 빛났다.

자원빈국의 설움에서 솟구쳐 나온 염원의 불길은 이후에도 전남 진주 앞바다를 훑고 제주도 남쪽 ‘제7광구’로 옮겨붙었다. 하지만 기다리는 소식은 끝내 오지 았았다.

에너지 위기 극복 방안을 고심하던 관료들은 바다 밑 ‘검은 황금’에서 중동의 ‘오일 달러’로 관심을 돌렸다. 군인 정신으로 무장한 제대 장병과 낮은 인건비를 앞세우면 글로벌 건설시장의 전쟁터에서 선진국과 붙어볼만 하다고 판단했다. 곧이어 정부는 중동 진출 총공세를 선언하고 관련 기업에 각종 혜택을 제공하겠다고 발표했다. 건설업체들은 앞다퉈 중동행 비행기에 오를 청년 근로자 모집 광고를 내걸었다. 바다 건너 7500km 떨어진 열사의 땅을 향한 한국판 ‘골드러시’의 시작이었다.

건국 이래 최대 외화벌이였던 중동 특수는 1976년 본격화해 1980년대 중반까지 이어졌다.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1982년 중동 진출 근로자는 15만1500여명으로 전체 남성 근로자수의 2%에 가까웠다. 1960년대 독일 광부·간호사 파견, 베트남 파병을 압도하는 대규모 ‘인력 수출’이었다. 건설업체는 천문학적인 수주를 발표하며 주식시장의 ‘다이아몬드’로 급부상했다.

◆3년 반 만에 53배 폭등

“이틀 전보다 비싼 값엔 건설주 매수 주문을 받지 않습니다.”

1977년 3월11일. 증권업협회는 사상 초유의 ‘주가동결 조치’를 발표했다. 증권사 자진 결의를 통해서라도 ‘묻지마 건설주 투자’ 확산을 막겠다는 의도였다. 당시 ‘다이아몬드주’로 불리던 건설주는 1975년부터 장장 3년 반 동안 가파른 상승세를 지속했다. 종합건설업지수는 1975년 1월 7.45포인트(당시 평균주가 방식을 지금의 시가총액 방식으로 환산한 수치)로 시작해 1978년 6월 말 403.34포인트로 53배나 뛰었다.

상장 건설사 ‘빅2’였던 동아건설산업과 대림산업이 대장주로 시장을 주도했다. 동아건설산업은 이 기간 주당 500원 아래서 7000원대로 치솟았고, 대림산업은 1976년 2월 공모가액 1500원에 상장한 뒤 9000원 가까이 급등했다. 삼환기업도 4000원 수준에서 8만원대로 뛰었다. 유상증자(신주 발행)까지 감안하면 실제 기업가치 상승 폭은 훨씬 컸다.

건설사 기업공개(IPO) 날엔 새벽부터 청약을 받으려는 투자자들이 장사진을 쳤고 일반 제조업체는 건설업 진출 계획만 내놔도 상한가로 치솟았다. 투기가 절정에 달하던 1977년, 국내 주식 거래대금은 1조3500억원으로 전년의 두 배로 불어났고 건설주 거래가 전체의 20%를 차지했다.

증권거래소는 동원할 수 있는 규제를 모두 꺼내들며 진화에 나섰다. 1977년 2월엔 건설주 전체를 지금의 투자주의 종목인 ‘특별포스트’에 편입하고 신용거래를 제한했다. 같은 해 3월 증권업협회가 내놓은 주가동결 조치는 비판 여론에 밀려 2주 만에 해제하면서 일시적인 효과를 보는 데 그쳤다. 급기야 거래소는 1978년 4월 증권사와 관계 기관에 건설주 보유량을 보고하도록 지시했다. 물량을 모두 시장에 내놓으라는 묵시적 종용이었다. 지위를 이용한 엄포는 더 내놓을 카드가 없다는 고백과 다름없었다.

◆천문학적 유동성

투자자들은 연이어 터져나오는 천문학적 수주 금액에 이성을 잃고 열광했다. 중동 국가들은 오일쇼크로 벌어들인 막대한 돈을 사회간접자본(SOC) 확충에 쏟아부었고 국내 건설사들은 값싼 노동력을 무기로 수주전에서 잇따라 승전고를 울렸다.

중동 수주금액은 1973년 1억7400만달러에서 1976년 25억달러, 1977년 35억달러, 1978년 81억달러로 매년 불어났다. 중동 건설사업의 포문을 연 삼환기업은 횃불을 든 채 밤샘 작업으로 공기를 줄이고 추가 계약까지 따내는 ‘횃불 신화’를 썼고, 현대건설은 1976년 당시 한국 정부 예산(약 2조원)의 4분의 1에 달하는 9억6000만달러(당시 1달러=500원 수준) 규모 ‘주베일 산업항 공사’를 거머쥐는 개가를 올렸다.

경상수지 적자 확대로 신음하던 정부도 파격적인 지원에 나섰다. 1975년 12월 ‘중동 진출 촉진 방안’을 발표하고 해외건설 사업 및 근로소득 조세 부담을 절반 수준으로 낮춰줬다. 또 음지에선 수주 로비를 벌였고 국내 기업 간 경쟁을 차단했다. 이렇게 월 300시간에 육박하는 가혹한 근로 환경에서 흘린 땀과 맞바꾼 오일 머니는 1977년 한국의 경상수지를 흑자로 돌려놓았다.

1975년 3월 서울 압구정동 아파트 착공으로 불붙은 강남 개발 붐은 중동 건설과 함께 건설주의 파죽지세를 이끈 쌍두마차였다. 하지만 오일 달러의 유입과 기대 인플레이션 상승, 부동산 투기 열풍은 각종 사회 문제를 낳았다. 오일쇼크 여파로 1975년 25.2% 뛰었던 소비자물가지수는 1977년 10.1%까지 내림세를 타다가 빠르게 반등하기 시작했다. 1978년 6월12일. 마침내 정부는 과도하게 부풀어 오른 풍선의 바람을 강제로 빼는 조치를 단행한다. 전격적인 ‘금리 인상’이었다.

◆시장 냉각과 투자자 항의

“종합적인 부양책을 내놓지 못하면 차라리 휴장하라.”

건설주가 바닥을 모르고 떨어지던 1978년 11월 22일. 300여 명의 투자자들이 서울 명동 거래소 앞에서 항의 시위를 벌였다. 소동은 경찰의 강제해산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부산 대구 등지의 증권사 지점에서도 비슷한 소란이 잇따랐다. 객장에선 울음소리가 터져나왔고, 거래소 정문 앞은 이사장을 만나겠다는 투자자와 경비원 간 실랑이가 벌어졌다.

온갖 규제에도 아랑곳하지 않던 건설주는 금리 인상 발표를 변곡점으로 자유 낙하에 들어갔다. 당시 한국은행 금융통화운영위원회는 1년 만기 정기예금 금리를 6년 만에 최고인 18.6%로 4.2%포인트 인상했다. 일반 대출금리는 16%에서 19%로 조정했다. 한국 금융사상 가장 전격적인 금리 인상 가운데 하나였다. 건설업지수는 1978년 6월 말 400포인트대에서 그해 말 220포인트로 급전직하했다.

정부는 금리 인상 두 달 뒤인 8월 8일 ‘부동산 투기 억제 및 지가 안정을 위한 종합대책(8·8 조치)’을 내놓으면서 아파트 시장에도 찬물을 끼얹었다. 토지거래 허가제, 기준지가 고시제, 부동산거래용 인감증명제 등 투기 억제책이 동시다발적으로 쏟아졌다.

높은 주가를 이용하려 앞다퉈 실시했던 유상증자 물량은 분위기 역전과 동시에 건설주를 무겁게 짓누르는 매물로 변신했다. 장이 예상보다 빠르게 식자 거래소에서 다시 각종 급등제한 장치를 풀었지만 대세 하락을 막지 못했다.

1979년 이란의 석유수출 중단 발표를 발단으로 ‘2차 오일쇼크’가 터졌을 때 건설주는 이미 회생 불능의 상태였다. 같은 해 10·26 사태까지 겹치면서 주식시장은 극심한 혼란에 빠졌다. 1979년 말 건설업종지수는 122포인트를 나타냈다. 1년 반 만에 시가총액의 70%가 사라진 셈이다. 시장에선 컬러TV 방송 조기 방영설이 전자업종 주식을 끌어올리고 있었다. 중동 건설 붐이 만들었던 ‘다이아몬드’ 건설주 시대의 끝을 알리는 신호였다.

◆위기 때마다 수술대 오르기도

건설주는 1981년 상반기에도 한 차례 가파른 반등을 시도했다. ‘제2 건설주 파동’으로 불리는 랠리는 그러나 그해 5월 장영자·이철희 부부의 구속 수사로 단기간에 막을 내린다.

장씨는 중견 건설업체 등으로부터 대규모 어음을 받아 사채시장에서 할인(현금화)하는 방식으로 막대한 현금을 굴린 것으로 드러났다. 현금은 다시 다른 회사에 빌려주거나 건설주 매수 등에 사용했다. 현금부족에 시달리는 기업에 접근해 거액을 빌려주고 훨씬 큰 금액의 견질어음을 교부받는 행각을 반복했다. 이 같은 어음 유통 총액은 무려 2624억원에 달해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다. 장씨 수사는 사채시장의 마비를 가져왔고, 주식시장은 건설업체들의 유동성 위기설로 홍역을 앓았다.

건설주 파동은 증권업계 선두주자인 삼보증권의 몰락을 불러오기도 했다. 주가가 손 쓸 새도 없이 떨어지면서 결제대금을 치르지 못한 거액의 미수계좌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고객의 환불 요구에 대비해 쌓아둬야 하는 시재금 마련에 실패한 삼보증권은 결국 1983년 3월 대우그룹 계열의 동양증권과 합쳐져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동양증권은 삼보증권을 흡수합병한 뒤 대우증권 간판을 내걸었다.

호경기를 틈타 난립한 건설업체들은 이후 40년 넘게 금융당국의 골칫거리로 전락했다. 과도한 부채 의존형 경영 탓에 신용경색 때마다 무더기로 수술대에 올랐다. 1997년 외환위기 충격파는 2000년까지 100대 건설사의 절반 가까이를 쓰러뜨리기도 했다. 중동 특수의 주역이었던 현대건설(2001년 채권단 공동관리 개시)과 삼환기업(2012년과 2017년 회생절차 개시), 동아건설산업(2014년 회생절차 개시)도 영화를 잇지 못했다.

이태호 기자 th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