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재 기자 / 사진 백수연 기자] “어떻게 인내해야 하는지를 배웠다”tvN ‘알아두면 쓸데없는 신비한 잡학사전’에서 김영하 작가는 박경리 작가의 문학관을 방문했다. 그리고 ‘여류 작가’라는 표현을 묻는 제작진의 질문에 “그것은 일종의 멸칭이다. 지금은 쓰지 않는다”라고 덧붙였다. 소소한 얘기나 쓰는 사람을 지칭하는 표현이었지만, 소설 ‘토지’가 그것을 깨부쉈다는 것. 이처럼 한자 여(女)의 보편적 사용과 그 안의 멸시는 어떤 계기를 통해서 부숴진다.그렇다면 ‘여배우’라는 단어 안에 숨겨진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 사실 배우는 외양이 큰 부피를 차지하기에 객체로써 역량을 인정받는 작가와의 직접 비교는 힘들다. 오로지 비하의 의미만 담긴 것이 아닌 객관적 구분점으로 사용될 수도 있다는 이야기. 하지만 그럼에도 여성 배우는 남성 배우에 비해 한 가지 편견을 내포하고, 이것은 단어 ‘여배우’에도 그대로 살아있다. 배경은 장르인 액션이다.평균적으로 여성의 근력은 남성보다 아래에 있다. 그리고 이것은 거친 액션 신은 남성만 가능하다는 그릇된 우려를 조성한다. 훈련 속에서 동등한 혹은 비슷한 수준에 도달 가능한 것이 현실이지만, 대중과 영화계의 벽은 쉽게 허물어지지 않았다.하지만 2017년 여름 한 영화가 통곡의 벽을 허물기 위해 단검, 쌍칼, 장총, 권총, 도끼 등을 들고 극장가를 찾아온다. 영화 ‘악녀(감독 정병길)’다. 이 가운데 김옥빈은 정체를 숨긴 채 살아가는 킬러 숙희 역을 맡아 이제껏 볼 수 없던 여성 배우의 현란한 액션을 스크린에 수놓는다. 6월1일 서울 종로구 삼청로 한 카페에서 만난 그는 슬픔을 안고 있는 등장인물과 달리 기분이 좋아 보였다.
‘악녀’는 살인 병기(兵器)로 길러진 최정예 킬러 숙희가 그를 둘러싼 비밀과 음모를 깨닫고 복수에 나서는 액션물. 먼저 강렬한 액션을 소화하는 것이 힘들진 않았는지 물었다. “육체적 고통이 있었지만, 정신적 고통이 함께 왔다. 액션은 굉장히 강렬하지만, 타인을 무자비하게 살육하는 여자가 가지는 감정이 너무 퓨어(Pure)했다. 결국 판타지로 생각하니까 이해의 폭이 넓어지더라.”제작보고회에서 정병길 감독은 레퍼런스 영화를 찾는 것보다 아무도 하지 않은 앵글에 골몰했다고 밝혔던 바 있다. 반면 김옥빈은 여성이 나오는 액션 영화는 거의 다 찾아봤다고. “고전으로는 영화 ‘롱키스 굿나잇’. 이 밖에도 ‘원티드’ ‘엘렉트라’ ‘루시’ ‘한나’ 등 다 찾아봤다. ‘레지던트 이블’ 시리즈는 물론이고, ‘킬 빌’은 당연하고. 심지어 ‘울트라 바이올렛’까지. (웃음) 다 찾아봤다.”어디까지 김옥빈의 액션이고, 또 어느 부분까지 스턴트 맨의 활약인지 묻자 그는 “한강에 뛰어드는 극한 장면 등을 제외하면 거의 내가 했다”라며, “비녀를 가지고 하는 액션도 100% 전부 나였다. 옷을 얇게 입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쓸 수 없었다. 마지막 엔딩 액션도 거의 다 내가 했다. 자동차 보닛 위에 매달리는 것도 나였고, 마을 버스 안에서 펼쳐지는 액션 신도 마찬가지다”라고 강조했다.“어쩌다 보니 다 내가 하게 됐다”라며 겸손도 잃지 않았다. “위험하지 않다고 느꼈다. 위험한 장면은 많았지만, 안전 장치를 다 했으니까 두려움은 없는 상태였다. 그리고 대부분의 신들이 다 내 얼굴이 나오는데 어떻게 누구를 데려다 쓰겠는가. 뒷모습으로 찍어주든가. (웃음) 감독님에게 너무 한다고 하소연했다.”
영화에는 신하균, 성준, 김서형, 조은지 등이 출연하지만 러닝 타임 내내 관객과 호흡하는 배우는 숙희 역의 김옥빈뿐이다. 페이스 메이커 없이 악 2시간여의 극을 홀로 이끌어가는 것에 대한 부담감이 상당했을 터다. 그는 “내가 약간 용감한 것 같다”라는 말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또한, 외로웠다고 말했다.“대본을 받았는데 전체 회차 중 90% 이상에서 숙희가 등장하더라. 매일매일 촬영장에 출근했고, 나중에는 체력적으로 참 힘들었다. 현장에 나가면 동료 배우들 없이 나 혼자 촬영하는 날이 많았다. 더불어 액션은 대사나 감정을 주고 받는 것 없이 몸으로 하는 대화다. 혼자 매달리고, 날아가고, 싸우고. 다시 말하지만 홀로 촬영하는 날이 진짜 많았다. 그때 처음으로 외롭다는 생각을 했다.”외로움의 늪에서 의지가 되는 인물은 신하균이었다. “(신)하균이 오빠가 영화 ‘7호실’ 때문에 빨리 오빠 분량을 촬영하고, 중간에 빠져야 됐다. 오빠 촬영 마지막에 내가 붙잡았다. 오빠 가지 말라고. 오빠 가면 나 이제 무슨 재미로 촬영하냐고. 하균이 오빠와는 너무 어릴 때부터 동료였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정말 의지하는 사람이었다. 현장에서는 감독님보다도 오빠와 더 많이 내 신에 대해서 대화를 많이 했다.”
김옥빈과 신하균. 두 사람의 만남은 처음이 아니다. ‘악녀’는 영화 ‘박쥐’ ‘고지전’ 이후 두 배우의 세 번째 조우작. 특히, 박찬욱 감독의 ‘박쥐’를 통해 그들은 ‘제62회 칸 영화제’를 방문했던 바 있다.둘의 앙상블이 만들어내는 향에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는 것일까. ‘악녀’는 8년 만에 ‘박쥐’ 커플을 다시금 프랑스 칸으로 이끌었다. 이와 관련 ‘악녀’는 ‘제70회 칸 영화제’ 비경쟁 부문인 ‘미드나잇 스크리닝(Midnight Screenings)’ 초청작이다. 또한, 영화제 경쟁 부분 심사위원으로 위촉된 박찬욱 감독과 김옥빈의 만남을 담은 사진은 작지만 의미 있는 기시감을 불러일으켰다.“그때도 (박찬욱) 감독님하고 같이 가서 섰는데, 이번에는 감독님이 내가 다른 감독님과 함께 걸어가는 것을 멀리서 손뼉 쳐주셨다. 느낌이 굉장히 이상했다. 영화 상영이 끝나고 나서 감독님이 ‘(신)하균이도 왔으면 참 좋았을 걸’이라고 말씀하시더라. 감독님은 심사위원으로 오시고, 나는 배우로 다시 그 자리에 서게 되니까 느낌이 조금 이상했다. 알 수 없는 애잔함이라고 할까.”영화는 모두의 기호를 충족시켜야 하는 범대중의 예술이다. 대자본이 투입되는 이상 존재의 이유가 포괄성을 띄는 것은 매우 당연한 수순. 이에 어떤 성공이 발생하면 그것을 따라하기 위한 흐름이라는 것이 창조된다. 이것의 다른 말은 유행으로, 그동안 충무로에서는 ‘멜로’부터 ‘조폭’까지 갖가지 장르들이 자가복제를 거쳐왔다. 과연 ‘악녀’는 ‘여성 액션’이라는 새로운 유행을 창조해낼 수 있을까.이에 김옥빈은 “이번 영화가 잘 됐으면 좋겠다. 그래야 여성 캐릭터들이 더 다양하게 나올 것 같다”라며, “‘악녀’가 여성이 액션 장르를 소화하는 데 무리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단초가 될 수 있을진 아직 모르겠다. 하지만 만약에 잘 해냈다고 인정받는다면 그 다음에 뭔가 유행처럼 나오지 않을까 기대는 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양의 기운을 잠재울 김옥빈의 희망이 미소와 함께 터져 나왔다.
인터뷰 막바지에 “숙희를 영화로 표현하자면 장르는 액션이다. 배우 본인을 영화로 표현하자면 장르는 무엇인지 궁금하다”라고 질문을 던졌다. 영화에는 실재의 재현과 극적인 허구가 혼재된다. 그렇다면 정반대로 사람의 하루 혹은 일생을 영화의 장르로 설명하는 것도 가능하다는 전제에서 비롯된 물음이었다.특히, 김옥빈이라면 색다른 대답이 나올것만 같았다. 영화 ‘다세포 소녀’ ‘여배우들’ ‘열한시’ 등 그간 평범을 거부하는 영화와 역할로 관객과 함께 호흡해왔던 그가 아니던가. “나의 장르는 성장 드라마다. 성장 드라마 정말 좋아한다. 이번 영화는 소화해야 되는 것이 많았다. 그것을 어떻게 인내하고 집중해야 하는지를 배웠다. 처음은 힘들다. 하지만 두 번째는 쉽다.”스스로를 성장형 배우라고 칭하는 김옥빈. 그리고 충무로를 발전시킬 영화 ‘악녀’. 상승을 매개로 한 뼘 전진하고 이는 둘의 만남은 우연 아닌 필연으로 다가온다. 영화는 5월17일부터 상영 중이다. 123분. 청소년 관람불가. 손익분기점 190만 명. 제작비 46억 5천만 원.+α. 여성, 액션 그리고 복수김옥빈이 레퍼런스로 언급했던 ‘여성 액션’ 영화들 중 몇몇은 복수가 골조를 이룬다. ‘롱키스 굿나잇’은 딸을 빼앗긴 엄마가 복수에 나서고, ‘킬 빌’ 시리즈에서는 주인공이 남편과 아이를 앗아간 것을 복수한다. 이쯤 되면 여성의 복수는 액션 장르의 한 갈래인 셈. 특히, 신체적 약자가 휘두르는 강자를 향한 철퇴라는 점이 역설의 카타르시스를 안겨준다. 그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콜롬비아나’도 액션이 돋보이는 여성의 복수극이다. 지나 데이비스, 우마 서먼, 조이 살다나 그리고 김옥빈. 여배우의 복수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사진출처: bnt뉴스 DB, 딜라이트)bnt뉴스 기사제보 star@bn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