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칼럼]세계 최초 하이브리드카는 어떻게 개발했을까③

입력 2016-05-30 09:58
수정 2016-06-19 16:23
세계 최초 하이브리드카로 토요타 프리우스를 꼽는다. 1995년 도쿄모터쇼에 컨셉트카로 등장한 뒤 1997년 양산차로 나왔으니 벌써 19년이 지난 셈이다. 그 사이 프리우스는 4세대로 진화하며 전기 활용 기술을 향상시켰고, 덕분에 글로벌 시장에서 '하이브리드=프리우스'라는 등식을 만들어냈다. 그런데 원래 프리우스에는 전기 사용 계획이 없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지금 프리우스는 전력을 활발히 사용하고 있다. 어떻게 전기가 들어갔을까. <편집자>

▲문제투성이 시작차(始作車)

1995년 10월, 도쿄모터쇼에는 예정대로 컨셉트 '프리우스'가 출품됐다. 물론 '하이브리드'라는 용어조차 생소할 때여서 일반 관람객의 관심은 적었지만 경쟁사 엔지니어들의 시선은 집중됐다. 경쟁사 또한 고효율의 시장 대응력을 갖춘 제품 개발에 한창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기소 사토시 개발 담당은 난감했다. 컨셉트 발표 이후 시작차를 만들었는데, 전혀 움직이지 않았던 탓이다. 컴퓨터 시스템이 오류를 일으키고, 모터가 돌지 않고, 엔진 작동이 되지 않는 등 그야말로 문제투성이였다. 또한 엔진으로만 가동에 들어가도 움직이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물론 이상하다고 생각되는 곳을 확인하고 다시 시험에 들어가는 것을 반복했지만 하이브리드 시스템이 처음이라 불량의 원인을 찾는 것도 쉽지 않았다. 특히 THS에서는 구동의 형태가 하나가 아니어서 컴퓨터가 가장 효율이 좋은 형태를 판단해 선택하는데, 자동차가 움직이지 않는 원인은 단순한 것이 아니다. 그러자 개발팀은 아날로그 시험기를 사용하거나 컴퓨터로 디지털 신호를 모두 읽어 착실하게 조사했고, 결국 시험차를 구동하는데 무려 49일을 소모했다.



오기소 사토시 개발 담당은 "처음은 구동이 쉽지 않았습니다. 컴퓨터도 모터도 개선해 나갔지만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죠. 그래서 어떻게든 모터로 5m를 움직였는데, 이 때는 엔진이 작동하지 않고, 엔진과 모터 양방을 작동시키려고 하면 또 멈추는 등 애로가 많았죠. 하지만 이후 개선을 거치며 500m를 달리고, 이후 주행거리를 늘려가며 문제점을 차츰 해결해 나갔습니다. 어떻게든 연말 안에 성과를 얻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지요"라고 회고한다.



하지만 제품화에는 아직 갈 길이 멀었다. 효율을 두 배로 높여야 한다는 목표를 해결해야 했고, 내구성도 확보해야 했다. 출시 시점인 1998년 말에 맞추려면 개발에 속도를 내야 했다. 그러나 이 때 개발진의 부담을 가중시킨 결정이 내려졌는데, 판매 시점을 1년 앞당긴 경영진의 판단이었다. 취임한지 얼마 안 된 오쿠다 히로시 사장의 생각이었고, 개발팀은 거절할 수 없었다. 오쿠다 히로시 사장은 엄밀하게 21세기가 오기 전에 제품을 내놔야 주목을 받을 것으로 판단했고, 그렇다면 1997년에 내놓는 게 좋을 것이라고 여겼다. 더불어 1997년은 일본 쿄토에서 제3회 기후변화체결국회의(COP3)가 예정돼 있어 해당 시기에 맞추는 게 중요하다고 여겼다는 후문이다. CO2를 줄이자는 글로벌 국가들의 회의 때 하이브리드 프리우스를 이용토록 하자는 목표였던 것이다.

물론 어려움은 계속됐다. 니켈수소전지의 성능이 기대만큼 나오지 않고, 크기도 예상보다 컸다. 잦은 충방전 때문에 배터리 수명이 단축되는 문제도 해결해야 했다. 게다가 양산화 단계에선 240개의 셀을 직렬로 잇는 복잡한 제품의 품질관리를 철저히 할 필요가 있었다.

과제는 배터리에만 그치지 않았다. 인버터 유닛의 중추부에는 절연 게이트 바이폴라 트랜지스터(IGBT)라 불리는 반도체 모듈을 이용하는데, 고열이 문제였다. 그래서 열원이 되는 엔진과 공존시키기 위해 냉각 방법을 궁리해야 했고, 시험 과정도 지루하게 반복됐다.

그러나 무엇보다 큰 문제는 효율이었다. 오히려 코롤라보다 효율이 떨어지는 문제가 불거졌다. 고효율을 표방했지만 저효율이 나오니 개발진도 난감했다. 그리고 해결책으로 떠올린 아이디어는 소형 엔진이었다. 당시 경차용으로 개발됐던 'NZ'를 사용하기로 결정한 것. 이른바 앳킨슨 사이클로 열효율을 향상시켜 고효율을 노린 것이다. 힘은 약해도 토크 부족은 모터 구동으로 보완해 성능 문제는 해결될 것으로 확신했다.

1996년 3월, BRVF의 리더로 베테랑 엔지니어 야에가시 타케히사가 취임했다. 하이브리드 개발 체제를 강화하기 위한 경영진의 선택이었다. 야에가시는 각 부서에서 정예를 모아 제품화를 향해 단기 결전을 위한 인재를 확보했다. 주행 시험은 철야로 수행되었고, 차츰 1997년 말이라는 데드라인을 지킬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게 됐다.

그리고 때마침 개발진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음이 입증되는 일이 벌어졌다. 20세기 마지막이 가까워지자 세계적으로 기후 변화와 지구 온난화에 관심이 모이게 된 것이다. 인간의 경제활동에 의해 온실가스가 증가했고, 결국 급격하게 기온 상승 우려가 지적되면서 이산화탄소나 메탄, 아산화질소 등의 온실가스 삭감율을 나라별로 정해 기간 내에 목표치를 달성하도록 요구하기로 결정된 것이다. 이른바 '교토기후변화협약'이다. 고효율 저탄소를 추구했던 프리우스가 세상에 나오면 바로 주목받을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된 셈이다. 개발팀은 이에 발맞춰 속도를 냈고, 세계 최초 양산 하이브리드 출시는 조금씩 다가오고 있었다.

권용주 기자 soo4195@autotimes.co.kr

▶ [연재칼럼]최초 하이브리드는 어떻게 개발했을까①

▶ [연재칼럼]최초 하이브리드는 어떻게 개발했을까②

▶ [연재칼럼]최초 하이브리드는 어떻게 개발했을까④(마지막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