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석원 기자] 흔히 가을을 독서의 계절이라 일컫는다. 하지만 눈코 뜰 새 없이 숨가쁜 일상과 말초 신경을 자극하는 각종 스마트폰 콘텐츠들로 인해 책 장을 펼치기란 여간 쉽지 않은 것이 현실. 때마침 찾아온 가을을 빌어 곰곰이 자문해보자. 한 권의 책이 선사하는 지적이고도 감성적인 풍요에 짜릿한 쾌감을 느껴본 기억이 있지 않은가. 그때의 명민했고 섬세했던 감수성을 다시 한 번 경험해보고 싶지 않은가. 그렇다면 더는 망설이지 말고 오늘부터 ‘독서’를 시작하자.그러나 막상 시작하자니 어디서부터 어떻게 두드려야 할 지 막막한 이가 많을 것. 그래서 준비했다. 우리에게 매우 친숙한작가이자 가을과 어울리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 중 얇고 가벼우며 그림책에 가까운 구성으로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는 단편 소설과 에세이 3선을 모아 보았다.공허함에 발버둥치는 인간상을 향한 너그러운 시선, ‘빵가게를 습격하다’
두 편의 단편으로 구성된 ‘빵가게를 습격하다’. 화자 ‘나’가 청춘 시절의 파트너와 이유 모를 ‘공복감’에 빵가게를 습격하는 에피소드와, 세월이 흘러 가정 꾸린 뒤 과거와 동일한 원인으로 인해 아내와 함께 도쿄 시내의 한 맥도날드 습격을 시도하는 과정이 담겨있다.소설은 다소 엉뚱하면서도 비상식적인 내용이 주를 이루는 데다 결말 또한 이렇다 할 맺음말 없이 모호하게 지어진다. 그러나 이가 위트와 재치 가득한 문체로 그려져 있어 읽는 내내 허무함보다는 한 편의 꽁트와 같은 유쾌한 감상을 선사한다. 한편 책을 덮고 나면 달콤쌉쌀한 여운이 한동안 머릿속을 맴돈다. 가만히 곱씹어 읽다 보면 이야기 속 화자가 호소하는 공복감이란 과연 어떠한 내면의 상태를 지칭하는 지를 각자의 과거 경험들을 통해 어렴풋이나마 공감하게 되기 때문이다. 소설의 무드와 오묘한 조화를 이루는 삽화들은 이러한 감상을 한 층 풍성하게 가꿔주는 좋은 볼 거리다.평범한 일상에 불현듯 찾아온 고요한 심연, ‘잠’
몇 주에 걸쳐 잠에 들지 못했지만 이렇다 할 불편이나 피곤을 느끼지 못하는 소설 속 화자. 따라서 치과의사인 남편을 내조하거나 초등학생 아들을 돌보는 일 등 지금까지의 ‘평범한’ 일상을 지속해 나가는데 전혀 지장이 없다. 오히려 쉽게 잠에 들던 과거보다 한 결 풍성한 삶이 시작됐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모두가 고이 숨죽여 있는 한 밤 중에 젊은 날의 애독서 ‘안나 카레니나’와 같은 러시아 고전 명작들에 심취한다거나, 때로는 조용히 차를 몰고 도시 이곳 저곳을 맴도는 등 혼자만의 ‘특별한’ 일탈을 향유할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한편 화자가 잠에 들지 못한다는 사실은 물론 매일 밤 이어지는 일탈을 주변 누구 하나 눈치채지 못한다. 따라서 그는 시간이 흐를수록내면의 심연 속으로 은밀하고도 고요하게,더 이상 빠져나올 수 없을 만큼 깊게 빠져들어간다. 이렇듯 ‘잠’은 어느 한 가정주부에게 잠의 상실과 더불어 불현듯 찾아온 ‘심연’에 대한 이야기다. 다소 초현실적인 소재가 작가 특유의 덤덤하면서도 힘 있는 문체와 초현실적인 상상력에 힘입어 높은 몰입을 이끌어 낸다. 독특한 화풍의 삽화가 더해져 한 층 몽환적인 무드 속에서 화자의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다는 점이 매력적이다. 잊고 지냈던 과거의 명민한 감수성을 다시금 느껴 보고픈 이들에게 추천한다.재즈에 대한 무라카미 하루키의 애정어린 속삭임, ‘재즈의 초상’
소설뿐 아니라 전문가에 버금갈 만큼 높고 다양한 음악 식견으로도 유명한 무라카미 하루키. 그가 가장 심취한 음악 장르는 단연 ‘재즈’다. 작가 데뷔 전 직접 재즈 바를 운영했던 과거의 이력이 이를 충분히 뒷받침 해준다. ‘재즈의 초상’은 재즈에 대한 작가의 마니아적 애정에서 시작된 에세이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재즈 뮤지션들의 음악 세계, 삶, 앨범 등에 대한 그의 개인적인 견해가 책 내용의 주를 이루고 있다. 여기에 일본의 유명 화가 와다 마코토가 작업한 뮤지션들의 초상화가 삽화로 더해져 한 장 한 장 읽고 있노라면 마치 도슨트가 동행한 갤러리 투어와도 같은 감상을 선사한다. 에세이는 빌 에반스, 빌리 홀리데이, 루이 암스트롱, 엘라 피츠제럴드 등 총 26명의 재즈 뮤지션들이 각각 하나의 단독 카테고리로 구성되어 있다. 퇴근 후 또는 나른한 주말 집 앞 카페에서 홀로 귀에 이어폰을 꽂은 채 본문에 소개된 음악들과 함께 감상한다면 더욱 풍성하게 즐길 수 있으니 참고하자. (사진출처: 예스24, bnt뉴스 DB)bnt뉴스 기사제보 life@bn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