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 Talk] 이브 생 로랑, “유행은 사라지지만, 스타일은 영원하다”

입력 2014-09-01 09:51
[최원희 기자] “내가 청바지를 발명했었으면 좋았을 거라고 자주 말하고는 한다. 가장 획기적이고, 실용적이고, 무심한 듯 하면서도 차분하다. 청바지에는 내가 나의 옷에서 바라는 모든 표현들이 담겨 있다. 단정함, 성적인 매력, 그리고 단순함까지”날렵한 재단, 완벽한 테일러링, 여성성을 잃지 않은 매니쉬한 무드까지. 남성의 상징으로만 여겨지던 수트를 여성의 섹시함을 드러내는 아이템으로 탈바꿈 시킨 그는 당시 보수적이었던 여성복에 자유를 입힌 패션혁명가라는 평을 받는다.이 평은 이브 생 로랑을 대변하는 가장 간결한 단어이자 그의 업적을 표현하는 중요한 지표가 된다.“나 자신을 표현할 수 없다면 죽은 것과 다름 없다” 1936년 알제리에서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어렸을 적부터 일찍이 예술에 관심을 보인 그는 53년 파리의 신인 디자이너를 뽑는 ‘인터내셔널 울 세크리테어리엇’에서 코트와 드레스, 수트 스케치로 3위를 차지하며 보그 디렉터 미쉘 브뤼노프의 눈에 띄었다.그의 무대 디자인에서의 커리어 권유에 무대 디자인에서 경험을 쌓은 이브 생 로랑은 2년 후 다시 한 번 ‘인터내셔널 울 세크리테어리엇’에 참가해 칼 라거펠트와의 경쟁에서 1등을 참여해 또다시 미쉘 브뤼노프와 마주했다.이 때의 스케치는 디오르의 A라인 스커트와 흡사했고, 이를 본 크리스티앙 디오르는 이브 생 로랑을 어시스턴트로 고용했다.이는 곧 디올 하우스에 많은 부분의 영향력을 과시하는 것으로 이어졌고, 디오르의 갑작스러운 죽음 앞에하우스의 수석 디자이너로꼽히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블랙에는 하나가 아니라 무수히 많은 색상이 존재한다” 하지만 디오르가 추구했던 상류층의 패션이 아닌 젊은 세대와 함께 하는 패션을 원했던 그는 62년 사업 파트너인 피에르 베르게와 함께 자신의 브랜드를 론칭한다. 피에르 베르게는 이브 생 로랑의 영원한 파트너이자 동반자로서 패션 이외의 모든 부분을 서포트해주었다.브랜드 론칭 후 이브 생 로랑은 65년 하나의 작품을 연상시키는 몬드리안 라인 컬렉션, 66년에는 여성복에 턱시도를 제안한 르스모킹룩, 흑인 모델의 최초 가용 등 다양한 이력을 펼치며 승승장구했다.코코 샤넬과 더불어 20세기를 이끈 디자이너로 평가받는 그는 이 후 최초로 뉴욕 메트로폴리탄에 뮤지엄 오브 아트 회고전을 연 디자이너이기도 한다.“수년 간 옷차림에 중요한 것은 그것을 입는 여성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브 생 로랑의 천재성은 패션계의 입문과 동시에 패션계를 화려하게 수놓았고, 81년 미국패션디자이너협회 CFDA 상, 85년 프랑스 국민훈장인 레지옹 도뇌르 훈장, 98년 프랑스월드컵 결승전 직전의 300여벌의 드레스 패션쇼 등 수많은 업적을 남겼다.패션계의 혁명가이자 예술가였던 그는 이 후 남성복, 화장품 등 다양한 라인을 론칭하며 승승장구했지만, 어려서부터 약한 몸과 정신 질환으로 평생 우울증, 약물중독에 시달려야 했다.하우스는 2002년 65세의 나이로 브랜드의 은퇴 및 구찌 그룹에 인수되었고, 그 후 하우스는 알버 엘바즈, 톰 포드, 에디 슬리먼 등이 운영하며 생로랑 파리로 브랜드명이 변경되었다.수많은 패션 디자이너들과 패션업계 종사자들에게 영감을 안겨준 그는 2008년 자신의 집에서 뇌종양으로 운명했고, 이 후 천재 디자이너 이브 생 로랑을 다룬 이야기는 영화로 그려지며 추억되었다. (사진출처: 이브 생 로랑 공식 홈페이지 및 페이스북, 트위터 캡처, 영국 보그 공식 홈페이지, 위키디피아 참고, bnt뉴스 DB)bnt뉴스 기사제보 fashion@bntnews.co.kr▶ ‘멋’을 아는 패셔니스타들의 백 스타일링 ▶ [History Talk] 안나 수이 “나의 패션쇼는 일종의 판타지”▶ “예뻐, 예뻐!” 따라하고 싶은 그녀의 스타일▶ [Photo&Fashion] 라이언 맥긴리의 청춘▶ ‘이 언니 여전히 예쁘네~’, 돌아온 로코퀸 장나라 스타일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