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 자격요건 강화하고 정보접근성 높일 필요…시장감시도 중요"
금융당국이 금융사의 지배구조를개선하고자 모범규준을 만들었지만 규정이 모호하고 예외를 폭넓게 허용하고 있어실효성에 대한 의구심이 나오고 있다.
모범규준의 실효성 확보를 위해 사외 이사의 자격 요건을 더욱 세분화하고 정보접근성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보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정부의 개입이 아닌시장이 스스로 감시 체제를 강화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12일 금융권에 따르면 자산규모 2조원 이상인 금융지주·은행·보험사 등은 정기 주주총회를 앞두고 금융회사 지배구조 모범규준에 맞춘 연차보고서를 공시하고있다.
금융당국이 지난해 만든 지배구조 모범규준은 사회적으로 논란이 된 금융사의사외이사 문제에 초점이 맞춰졌다.
1997년 경제위기를 계기로 대주주 전횡을 막고 최고경영자의 도덕적 해이를 차단하기 위해 도입한 제도가 사외이사제이지만, 그간 숱한 개선에도 좀처럼 견제와균형이라는 제도도입 취지를 살리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지난해 금융권을 뜨겁게 달군 'KB 사태'는 사외이사제도의 한계와 문제점을 극명하게 노출해 사외이사 '무용론'까지 제기될 정도였다.
이런 문제의식에 따라 모범규준에는 사외이사의 책임과 자격기준을 강화하는 내용을 담았다. 안정된 지배구조 확립을 위해 CEO 승계 프로그램을 마련토록 하는 내용도 포함됐다.
제정 당시 신제윤 금융위원장도 금융사 사외이사 자리를 특정 전문직이나 직업군이 점령하면서 '자기 권력화'하는 현상을 차단하겠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하지만 모범규준 제정 이후에도 현실은 달라진 게 없다는 비판이 나온다.
특히 우리은행[000030]이 최근 신임 사외이사 후보 4명을 선임한 가운데 3명이정치권 출신이거나 정치권과 관련 있는 것으로 알려지면서 논란이 거세다.
농협금융지주도 지난달 새로 영입한 사외이사 4명 중 3명이 관료 출신이다.
오정근 아시아금융학회장(건국대 특임교수)은 "우리은행 사외이사 후보들은 모두 모범규준의 자격조건은 피해갔지만 선임된 인물은 결국 정피아와 연관된 인사들"이라고 말했다.
그는 "규정이 모호하고 강제력도 없다 보니 결국 모범규준을 빌미로 관치가 더판을 치는 꼴이 됐다"고 말했다.
금융사가 임의로 예외조항을 둬 모범규준의 도입 취지를 무색하게 한 경우도 있다.
삼성생명과 삼성화재 등 삼성 금융계열사는 모범규준에 따라 연차보고서에 CEO자격을 규정하면서 '이사회가 CEO로서 충분한 자질과 능력을 갖췄다고 인정할 경우예외로 할 수 있다'는 단서 조항을 달았다.
금융 관련 경력이 없더라도 CEO로 선임할 수 있는 여지를 둔 셈이다.
모범규준은 제정 당시 의견수렴 과정에서 '주주권 침해'라는 재계의 반발로 임원후보추천위원회 구성 의무를 제2금융권에는 적용하지 않기로 원안에서 완화된 바있다.
그러나 가장 예민한 부분인 CEO 승계절차에 폭넓은 적용 예외 규정을 두면서 제도 취지를 무색하게 한 것이다.
모범규준이 많은 허점을 지니고 있지만 업계 반발을 무릅쓰고 어렵게 마련한 제도인 만큼 보완을 통한 실효성 확보를 요구하는 목소리도 높다.
김상조 한성대 무역학과 교수는 "제대로 해야 할 부분은 허술한 경우가 많고 유연할 필요가 있는 부분은 금융당국이 강제적으로 종용하면서 모범규준이 경직되고실효성을 상실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지배구조 연차보고서 공개와 관련해서도 "전문 투자자만이 아니라 일반투자자 및 이해관계자들도 관련 정보를 쉽게 취득하고 이해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며"세부적인 정보를 담는 것도 중요하지만 접근성과 가독성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문종진 명지대 경영학과 교수는 "사외이사가 거수기로 전락한 것은 무엇보다 전문성이 없기 때문"이라며 "사외이사의 자격 요건을 더욱 구체화하고 강화할 필요가있다"고 강조했다.
모범규준의 이행을 넘어 시장이 스스로 바람직한 지배구조를 유도하도록 감시체제를 구축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이필상 서울대 경제학부 겸임교수는 "모범규준 시도 자체는 바람직하지만 중이제 머리를 못 깎는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정부, 정치권, 재계 등 지배구조와 관련한 이해관계자들이 자발적으로 기득권을 내려놓을 동인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미국에는 회사의 지배구조나 영업행태에 문제가 있으면 시장이 바로주식가치에 반영시키는 '월스트리트 룰'이 작동한다"며 "이해관계자가 기득권에 안주하지 못하도록 시장이 감시 기능을 발휘해야 한다"고 말했다.
pan@yna.co.kr(끝)<저 작 권 자(c)연 합 뉴 스. 무 단 전 재-재 배 포 금 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