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경제가 '상저하고(上低下高·상반기에 성장률이 낮다가 하반기 높아지는 것)' 형태로 성장할 것이라는 정부와 한국은행의 예측이 빗나가면서 재정 조기집행의 실효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상반기에 어려울 것으로 보고 하반기 중에 쓸 돈을 미리 당겨서 썼는데, 하반기에도 경기가 회복되지 못하면 집행할 예산이 부족해 경기가 더욱 나빠지는 일종의 '재정절벽'이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다.
또 재정 조기집행은 오히려 경기변동성을 키우는 요인이 된다는 의견이다.
작년의 경우 상반기에 재정의 58%를 투입한 데다 세수 부족까지 나타나 정부가4분기에 쓸 수 있는 재정여력이 더욱 줄었다. 이는 작년 4분기 경제성장률(전기비기준)이 0.4%로 뚝 떨어진 원인이 됐다.
◇ 12년간 재정 조기집행 26일 정부의 국가결산보고서에 따르면 정부는 2003년 재정 조기집행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이후 2008년을 제외하고는 단 한 차례도 예외 없이 상반기에 재정 지출을더 많이 했다.
재정 조기집행은 기본적으로 '상저하고'의 경기 전망을 토대로 한다. 상반기에집중적으로 재정을 투입하면 '상저하고의' 경기 변동을 완화할 것으로 기대하는 것이다.
정부는 글로벌 금융위기 여파를 맞은 2009년에는 재정의 64.8%를 상반기에 썼고, 2010년에도 61%를 조기 집행했다. 이후 2011년 56.8%, 2012년 60.9%, 2013년 60.
3%, 지난해 58.1% 등 비슷한 기조를 이어왔다.
정부는 올해도 내수 회복과 경기 대응을 위해 재정의 58%를 상반기에 집행하기로 했다. 내년 예산에서 인건비·기본경비 등을 제외한 303조5천억원 가운데 176조원을 상반기에 쓰겠다는 것이다.
정부는 특히 경제에 파급 효과가 큰 일자리, 사회간접자본(SOC), 서민생활안정분야의 경우 연간 예산의 60%를 상반기에, 나머지 40%를 하반기에 투입키로 했다.
그간 재정 조기집행은 경기 진작에 일정 부문 기여한 것으로 평가된다.
한국조세재정연구원은 지난해 재정 조기집행이 경제성장률을 0.3%포인트 끌어올린 것으로 분석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우리나라가 재정 조기집행 등 효과적인 정부 정책으로 2009년 세계경기 침체를 극복했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2009년에는 공격적인 재정조기집행으로 1분기 성장률이 플러스로 전환되기도 했다.
◇ '경기 변동성 높여 성장률 꺼뜨린다' 반론도 그러나 최근 몇 년간 정부와 한은의 상반기 경기 전망이 어긋나면서 재정 조기집행이 오히려 경제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한은은 최근 4년간(2011∼2014년) 한국 경제가 '상저하고'의 흐름을 나타낼 것이라고 전망(4월 수정경제 전망 기준)했다.
그러나 2013년을 제외하고 경제는 상반기에 성장률이 오르다 하반기에 둔화되는'상고하저(上高下低)'를 보였다.
일부 전문가들은 '상고하저' 경기 상황에서 재정 조기집행은 경기 변동을 확대시킬 수 있다고 우려한다.
정부의 연간 예산이 100원이라고 했을 때, 상반기에 60원을 쓴 상태에서 하반기경기가 예상보다 안 좋아지면 재정을 투입해 경기를 부양할 수 있는 여력이 부족해진다.
여기에다 세수 부족 사태까지 맞아 예상보다 세금 10원이 덜 걷히면 결국 하반기에 쓸 수 있는 돈은 30원밖에 없어 경기가 더욱 주저앉는다는 것이다.
백웅기 상명대 교수는 "재정을 상반기에 조기 집행한 이후 하반기에는 쓸 여력이 없으면 경기가 더욱 위축된다"며 "계속해서 '상고하저'의 경기 패턴이 나타나는한 원인"이라고 말했다.
특히 지난해 4분기에는 세수 부족 탓에 정부 지출이 줄어들면서 성장률이 0.4%로 급락했다.
한 국책연구원 연구원은 "연간 경제성장률이 잘 나오려면 1분기 성적표가 굉장히 중요하다"며 "정부로서는 어떻게든 1분기 성장률을 높여 출발선 자체를 끌어올릴필요가 있기 때문에 재정을 당겨 쓰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재정 조기집행이 상반기 경기가 나빠지는 것을 막는 데 일정 부분 기여했을 것"이라면서도 "조삼모사라고 표현할 수 있는 조기집행은 그 자체만으로는 큰 변화를 만들어내지 못한다"고 말했다.
박종규 한국금융연구원 박사도 "재정 조기집행이 상반기 성장률을 높이는 데는도움이 되겠지만, 연간 성장률을 전반적으로 끌어올릴 수 있을지는 의문"이라고 말했다.
◇ 재정 조기집행이 추경 편성 빌미 되기도 상반기 조기 재정집행이 매년 추가경정예산(추경) 편성의 빌미를 주고 있다는의견도 있다.
지난해에는 없었지만 추경은 재정 조기집행과 더불어 우리나라 재정운영의 '단골 메뉴'가 된 지 오래다.
재정을 상반기에 집중적으로 투입했는데 하반기 경기가 좋지 못하면 추경 편성이 불가피해진다. 추경 편성은 국가부채를 늘려 재정건전성을 악화할 수 있는 요인이다.
재정 조기집행에 따른 자금 부족분을 조달하려고 정부가 빌리는 일시차입금의이자비용도 만만치 않다.
세수 유입과 재정 지출의 속도 차가 나는데다 세금을 미리 걷을 수도 없기 때문에 정부는 조기 재정집행을 한 이후 재원 부족분을 충당하기 위해 한국은행 등에서돈을 빌려쓰고 있다.
정부가 지난해 1∼9월 한국은행 차입과 재정증권 발행 등 일시차입 과정에서 지급한 이자는 1천540억원에 달했다. 이는 정부가 작년 예산안에서 제시한 일시차입금이자상환 예산인 600억원의 세 배에 가까운 수준이다.
지자체별 재정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획일적으로 재정을 조기 집행하면 차입금부담 등으로 지방재정의 건전성이 나빠지고, 지역 경기가 악화될 수 있다는 우려도제기된다.
백 교수는 "무조건적인 재정 조기집행보다는 경제 위기 상황이 발생했을 때 조기집행을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며 "경기 부양이 목표라면, 재정을 투입했을 때 효과가 높은 곳에 적절히 배분하는 데 더욱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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