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위원회가 20일 발표한 '금융사 지배구조 모범규준'은 사회적으로 논란이 된 사외이사 문제에 초점이 맞춰졌다.
1997년 경제위기를 계기로 대주주 전횡을 막고 최고경영자의 도덕적 해이를 차단하기 위해 도입된 사외이사 제도는 그간 숱한 개선책에도 불구, 좀처럼 '견제와균형'이라는 제도도입의 취지를 살리지 못했다.
특히 올 한해 금융권을 뜨겁게 달궜던 KB사태는 사외이사제도의 한계와 문제점을 극명하게 노출, 사외이사 '무용론'까지 제기될 지경에 이르렀다.
금융위는 이러한 사회적 개혁요구를 수용, 사외이사의 책임을 강화하고 자격기준을 엄격히 하는 내용의 모범규준을 마련하고 재수술에 들어갔다.
◇사외이사 제도개혁의 초점은 '다양성' 금융권의 사외이사는 경영의 핵심이다. 은행지주 이사회의 경우 68명 가운데 사외이사가 51명이나 된다. 이들은 회장 추천권한까지 손에 쥐고 있다.
그럼에도 이 막중한 자리는 특정분야에 쏠려있다.
신한, KB,하나, 옛 우리 등 4대 금융지주를 토대로 사외이사 출신을 뽑아본 결과, 교수·연구원, 공무원의 사외이사 비율은 압도적이다.
작년 3월 기준 사외이사(34명)는 교수·연구원 26.5%, 공무원 23.5%, 법조인 14.7% 등이었지만 이 비율은 올해 9월말 현재 교수·연구원 50%, 공무원 12.5%, 법조인 9.4%로 달라졌다.
'관피아'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확산하자 교수·연구원에 대한 수요가 급증하면서 자리가 늘어난 것이다.
하지만 이는 KB사태에서 보듯 '사외이사의 전문성을 떨어뜨리고 무책임을 낳는결과를 가져왔다.
은행장과 지주사 회장간의 갈등이 경영상의 위기로 이어졌음에도 사외이사와 이들이 대다수를 차지하는 이사회는 아무런 조정역할을 못했다. 오히려 당국으로부터퇴진압박을 받는 임영록 전 회장을 두둔하는 모양새를 연출해 여론의 따가운 눈총이쏟아지기도 했다.
경영진이 입맛에 맞는 사외이사를 뽑고 은행지주 기준 연간 평균 5천700만원의짭짤한 부수익을 챙기면서 경영진을 두둔하는 '악어와 악어새의 공생관계'가 확인된것이다.
특히 교수 등 특정 직업군으로 사외이사진이 쏠리면서 서로 연임을 보장하는 자기권력화 양상까지 나타났다.
이에따라 금융위는 사외이사의 '다양성'을 모범규준의 핵심으로 끌어냈다.
우선 특정한 공통의 배경을 공유하거나 특정 이해관계를 대변하지 않도록 이사회 구성을 편중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규정했다.
'금융산업 이해 및 능력, 고도의 경험으로부터 나오는 비판적 관점이 적절히 혼합될 수 있도록 이사회 구성원을 균형있게 갖춰야 한다'는 영국의 회사 지배구조에관한 통합모범규준을 원용한 것이다.
사외이사의 자격요건에도 전문성, 책임성, 충실성과 함께 다양성을 규정했다.
사외이사후보추천위원에도 이를 명시해 미리짜고 서로 연임을 추천하지 못하게 막았다. 경영위험을 논하는 위험관리위원회와 성과보상 규모를 정하는 보상관리위원회역시 다양성 규정이 적용된다.
기관투자자나 주주 등 외부기관도 사외이사 후보군을 추천토록 해 채용루트를늘렸다.
금융위 관계자는 "이 규정에 따라 같은 학교출신, 같은 직업군으로의 쏠림이 크게 완화될 것"이라며 "특히 금융, 경영, 재무 등에 경험없는 교수, 공무원, 연구원 등이 사외이사로 나서기가 쉽지 않게 됐다"고 말했다.
◇사외이사 할 일 늘고 평가도 깐깐해져 사외이사들은 지금도 자체평가를 받는다. 단 공개항목은 평가여부다. 내용은 일반에 알려지지 않는다.
모범규준은 사외이사에 대해 금융사가 매년 자체평가를 하고 2년마다 외부기관에 의한 평가를 받으라고 권고했다. 과도한 부담을 우려해 일단 권고하는 형태지만장기적으로는 의무화할 계획이라는게 금융위의 귀띔이다.
자체평가 지표도 기업지배구조연구원, 금융연구원 등 외부기관으로부터 적정성을 점검받도록 유도해 평가의 내실을 기하기로 했다.
사외이사를 재임하려면 이 평가결과와 사외이사추천위원회의 검토보고서를 첨부하고 후보자의 약력이 아닌 경력을 세부적으로 기재하도록 해 시장의 평가를 따로받도록 했다.
사외이사가 되려면 주주총회에서 본인이 겸직여부, 금융회사와 관련성 등을 직접 소명하고 추천자와 후보자와의 관계, 추천경로 등을 상세히 밝혀야 한다.
사외이사의 보수를 비롯해 해당 금융사로부터 받는 각종 찬조금, 연구지원비 등도 연차보고서에 담도록 했다.
금감원은 이와 별도로 사외이사가 적격한지를 평가하게 된다.
이렇게 어렵게 사외이사의 문을 통과하더라도 임기를 오랜기간 보장받을 수 없다. 은행, 은행지주사의 임기가 2년에서 1년으로 줄어 언제 짤릴지 모르기 때문이다.
경영을 잘못하면 돈도 물어내야할지 모른다. 사외이사를 위한 임원배상책임보험의 보상범위를 80%하고 나머지를 본인이 부담토록 한 탓이다. 물론 자기부담 한도는 최대 1억원으로 제한해 뒀다.
◇내년 사외이사 대거 물갈이 예고…제2의 관치 논란도 제기 이번 제도개선으로 현 금융사 사외이사 체제에 큰 변화가 예고된다.
당장 눈길은 당국의 압박에도 불구, 퇴진을 거부한 KB금융[105560] 사외이사에쏠린다.
내년초 임기가 만료되는 사외이사는 이경재, 김영진, 황건호, 이종천, 고승의,김영과 등 6명인데 이중 4명이 실무경험이 없는 현직 교수다. 이들의 활동내역은 모범규준에 맞춰 서술식으로 구체적으로 공시가 된다. 일체의 경제적 이익이 담긴 개인별 보수, 평가결과 등도 공개된다.
금융권에서는 "이 잣대로라면 KB금융의 사외이사중 살아남을 사람이 한명도 없을 것"이라는 말도 흘러나온다.
일각에서는 금융당국이 KB사태에 따른 피해의식으로 지나치게 엄격하고 자의적일 수 있는 규정을 넣어 '제2의 관치' 가능성을 제기한다.
익명을 요구한 국책연구기관 연구원은 "사외이사의 구성폭을 넓히고 전문성을강조한 것은 바람직하지만 평가나 연임요건이 불명확하고 자의적이어서 당국이 마음만 먹으면 개입할 여지가 많다"며 "자칫 제2의 관치'로 흐르지 않을까 염려된다"고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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