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약품·생필품 감당 불가…일자리 '칼바람'에 중산층도 빈민가로
"美와 타협 모색한 것도 경제적 압박 때문"…"먹고살기 바빠 시위도 못한다"
이란 화폐 가치 연일 최저치 경신…1달러당 250만 리알

(카이로=연합뉴스) 김상훈 특파원 = 7개월째 이어지는 전쟁과 미국의 대대적인 제재 여파로 이란의 물가가 천정부지로 치솟으면서 서민들의 일상이 무너져 내리고 있다.
로이터 통신은 이란 주민들과 인터뷰 내용을 토대로 미국의 제재로 원유 수출이 타격을 받으면서 이란 국민이 임대료와 기본 생필품조차 감당하기 어려운 처지에 놓였다고 29일(현지시간) 보도했다.
이란 지도부는 대외적으로 전쟁에 대한 자신감을 내비치고 있지만, 내부적으로는 평범한 시민들의 생존이 벼랑 끝으로 내몰리고 있다는 지적이다.
물가 폭등은 일상 곳곳에 직격탄을 날렸다.
이란 북부에 거주하는 60대 주부 헤디예 씨는 치매를 앓는 노모의 기저귀와 약값을 대기에도 벅찬 실정이다. 새 학기를 맞은 손자에게 가방을 사주려 했지만, 가격이 5∼6배나 뛰어 결국 연필과 공책만 겨우 쥐여줬다.
테헤란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베흐남 리아지 씨는 "이윤이 거의 남지 않지만, 문을 닫으면 당장 실업자가 되기 때문에 울며 겨자 먹기로 영업하고 있다"고 토로했다.
사난다지에 사는 한 30대 여성은 담뱃값이 폭등해 반강제로 담배를 끊었다고 전했다.
경제난 속에 암시장 거래 비용과 관리들의 부정부패 단가마저 뛰었다.

복잡한 수술 행정 절차를 피하려고 외과 의사에게 200달러(약 26만원)의 뒷돈을 건넸다는 증언이 나오는가 하면, 신분증 없이 검문소를 통과할 때 경찰이 요구하는 뇌물 액수도 예전보다 훌쩍 뛴 것으로 전해졌다.
민간 부문의 일자리 감소와 중산층의 붕괴도 심각한 수준이다.
테헤란에 거주하는 한 직장인 여성은 1년 계약을 갱신한 바로 다음 날 해고 통보를 받았다. 한 건축가는 자동차 타이어가 펑크 났지만, 새 타이어를 살 돈이 없어 값싼 교체품을 구할 때까지 스페어타이어로 버티고 있다며 "이전에 비하면 모두가 가난해졌다"고 씁쓸해했다.
한 전진 엔지니어는 치솟는 주거비를 감당하지 못해 수도 외곽의 '반(半) 빈민가'로 밀려났다.
이런 극심한 경제난은 이란의 외교·국내 정치 상황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복수의 외교 소식통은 최근 이란이 미국 측에 호르무즈 해협 재개방 '7일 계획'을 제시하는 등 외교적 타협 모색에 나선 것도 이 같은 경제적 압박과 무관치 않다고 분석했다.
앞서 이란 당국은 지난 1월 경제난에 항의하는 시위대 수천 명을 유혈 진압한 바 있다.
그러나 인터뷰에 응한 이란인들은 하나같이 "당장 먹고사는 문제가 너무 시급해 시위는 생각할 겨를조차 없다"고 입을 모았다.

한편, 이란 화폐가치는 또 사상 최저치 기록을 갈아치웠다.
AP 통신에 따르면 이날 이란 수도 테헤란 외환시장에서는 미화 1달러와 250만 리알이 넘는 이란 화폐가 교환됐다.
이란의 통화 가치는 지난 2월 전쟁 발발 이후 연일 최저치 기록을 경신해왔으며, 지난 2일 1달러당 220만 리알을 기록했다.
meolakim@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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