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기 하나를 연구 개발하는 데는 엄청난 돈과 오랜 시간이 든다. 그래서 해커들은 둘을 동시에 노린다. 가상자산을 훔치고 기밀을 빼가는 것이다. 최근에는 인공지능(AI)까지 가세하면서 공격을 방어하는 일이 한층 까다로워지고 있다.
ADVERTISEMENT
그러자 국내 보안업체들도 칼을 빼 들었다. 이전에는 컴퓨터 등에 들어온 악성 코드를 잡아 지우는 것에 그쳤는데 이제는 미리 수상한 움직임을 감지해 접근을 막고, 유출된 정보가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쓰이는지 추적까지 한다. 보호 대상지도 사무실을 넘어 공장이나 연구소 등으로 다양화됐다. 무기를 지키는 역량을 확보하는 것도 방산 혁신의 일환이 된 것이다.
▲3년 새 5조 훔쳤다

북한에서 해킹은 이미 대규모 돈벌이 수단이 됐다. 한국과 미국, 일본 등 11개 나라가 참여하는 다국적 제재 모니터링팀(MSMT)은 북한이 2024년 1월부터 2025년 9월까지 약 28억 4천만 달러, 당시 환율로는 우리 돈 약 4조 원의 가상자산을 훔쳤다고 발표했다. MSMT는 북한 소행이라고 확실히 판명된 사건만 4조 원이라고 추산했다.
올해 역시 해킹은 계속되고 있다. 블록체인 업체인 체이널리시스는 지난 1일 북한 연계 조직의 올해 가상자산 탈취액이 10억 달러를 넘어섰다고 밝혔다. 두 곳이 추정한 탈취액만 합쳐도 5조 원이 넘는 거금이다.
ADVERTISEMENT
해킹 수법도 달라지고 있다. 과거에는 아는 사람을 사칭해 이메일을 보내고 첨부파일을 열도록 유도했다면 현재는 AI로 여러 업무 자료에 접근하는 등 일반인들이 손쓰기가 어려워지고 있다. 국내 보안 기업인 지니언스는 북한 해킹 조직 김수키가 지난 8월 해킹 중 AI를 활용한 정황을 포착했다고 밝혔다. 곳곳에서 훔친 자료를 AI로 취합, 분류, 분석하고 있고 반대로 AI로 그럴듯한 가짜 업무 자료도 제작해 피싱에 악용하고 있다는 게 회사의 설명이다.
▲무기 팔다 기술 내줄라

북한 등이 넘보는 것은 돈만이 아니다. 기술도 표적이다. 경찰청과 국가수사본부가 발표한 수사 결과 등에 따르면 북한의 해킹 조직인 라자루스, 안다리엘, 김수키 등은 국내 방산업체와 협력업체 등 10여 곳에 해킹 공격을 가한 바 있다. 임직원 이메일 계정을 뺏어 사내외 메일로 주고받은 내용들을 자국으로 전달한 것이다. 또 전산 유지·보수·정비 업체의 계정을 가로채 서버에 들어가기도 했다.
전투기를 제조하는 한국항공우주산업(KAI)도 2021년 해킹을 의심하고 경찰에 수사를 의뢰하기도 했다. 2024년에는 KAI에 파견된 인도네시아 기술진의 KF-21 관련 자료 무단 반출 의혹이 불거진 적도 있다. 외부뿐 아니라 내부에서 자료를 나르는 행위가 적발된 것이다.
무기를 판 다음에도 기술은 지켜야 한다는 여론이 지배적이다. 장비를 뜯어 역설계함으로써 기술을 베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예방하는 기술이 바로 ‘안티 탬퍼링’이다. 핵심 부품과 프로그램에 보호 도구를 걸어 허가 받지 않은 변조 등을 금지한다.
방위사업청은 지난 8월 안티 탬퍼링 기술을 연구 개발해 수출 무기에 의무적으로 실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국방과학연구소도 이달 관련 기관 공모에 나섰다. 사무실에 쌓인 자료들부터 해외에 판 무기까지 모두 기술 보호를 위해 지켜야 할 것들이다.
ADVERTISEMENT
▲AI 해킹 공방 격화

장벽을 높이자 AI를 이용한 첨단 해킹 공격이 거세지고 있다. 그러자 보안업체들도 AI를 이용해 방어에 나서는 모습이다.
미국 앤트로픽이 지난 4월 시행한 프로젝트 '글래스윙’이 대표적이다. 엔트로픽은 주요 기관과 기업에 AI 서비스를 제공해 각자의 소프트웨어의 보안 취약점을 찾도록 했다. 엔트로픽에 따르면 지난 4월부터 7월까지 확인된 취약점만 13만 건이 넘었다. 자체 조사 결과 치명적인 것들만 3만 3천 건을 웃돌았다.
다음 관건은 문제를 얼마나 빠르게 해결하느냐다. AI가 취약점을 발견하더라도 제거하지 않으면 헛수고가 된다. 이에 앤트로픽도 바로잡는 게 새로운 제약이 되고 있다고 진단하기도 했다.
ADVERTISEMENT
우리나라도 AI 해킹 탐지와 함께 대응하는 기술력을 고도화하고 있다. 대표적인 게 국정원과 국가사이버안보센터 주도로 국방부, 국가보안기술연구소, 금융보안원 등이 연구 개발한 ‘프로젝트 팔랑크스’다. 네이버클라우드도 연구 개발 환경을 지원하는 등 힘을 보탰다. 지난달에는 국제 사이버 훈련에도 참가해 사람의 개입 없이 가상의 시설로 향하는 해킹 공격을 방어했다. 당시 종합 점수 1위로 인간과의 점수 차이는 3배나 났다.
▲전 세계 지키는 K-보안

기업들도 보안 시장에서의 입지를 공고히 하고 있다.
백신으로 유명한 안랩은 컴퓨터와 네트워크의 이상 행위를 따라 대응하고, 전문 인력이 고객사의 보안을 원격에서 관리해주는 사업에 공을 들이고 있다. 이에 지난 3분기 연결 매출액은 795억 원, 영업이익은 109억 원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각각 23.1%, 38.7% 증가했다. 특히 앞선 컴퓨터와 네트워크 관련 보안 부문이 세 자릿수 성장세를 그리며 실적을 견인했다.
ADVERTISEMENT
안랩은 AI 사용의 안전성을 높이는 시장에도 진출했다. 안랩 컨소시엄이 맡은 한국연구재단 사업은 업무용 컴퓨터에서 생성형 AI를 써도 특정 자료는 외부로 나가지 않도록 통제하는 것을 목표로 추진되고 있다. 예를 들어 공개 자료는 AI에 넣을 수 있지만, 비공개 자료는 전송 자체를 제한한다. 기관 내 AI 활용 수요와 대외비 유출 수요에 동시에 대응하기 위한 사업으로 11월 말 마무리될 예정이다.
지니언스는 회사 전산망에 누가 어떤 기기로 접속하는지 식별, 감시하는 분야가 주력이다. 미승인 기기의 접속을 통제하는 동시에 혹시 침입하더라도 경로를 따라가 배후를 파헤치는 방식이다. 지난 상반기 연결 매출은 249억 2천만 원, 영업익은 43억 1천만 원으로 지난해보다 각각 19.9%, 294.3% 늘었다. 최근에는 해외에서 인기몰이 중이다. 중동에서만 매출이 50% 넘게 커졌고 해외 누적 고객사도 200곳을 돌파한 것으로 알려졌다.
에스투더블유(S2W)는 해커 중에서도 범죄 조직에 특화된 곳이다. 일반 검색으로 알 수 없는 다크웹 등에서 유출된 정보를 수집해 고객에게 알린다. 그러면서 국내외 국제형사경찰기구인 인터폴과도 협력 중이다. 올해 인터폴의 아프리카 사이버 위협 평가 보고서 발간과 국제 공조 작전 및 임무에 동참해 업계에서 주목을 받기도 했다. 지난달에는 범죄 수사를 돕는 AI 에이전트를 출시하고 정부의 보안 특화 AI 모델 연구 개발을 주도하기도 했다.
▲보안-방산 동맹 결성

앞으로의 보안이 컴퓨터 안이 아닌 밖으로 뻗는다 점은 선박을 놓고 보안업체와 방산업체가 만난 점을 통해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한국인터넷진흥원이 주관하는 선박 사이버 침해 사고 관련 대응 기술 연구 개발에 지니언스 등이 연구 개발을, 한화시스템 등이 수요와 실증을 각각 맡기로 했다. 선박 운용 중 혹시 모를 랜섬웨어를 예방하고 차단하려는 게 목적이다.
정부도 관련 투자를 확대하고 있다. 2027년 민간 분야 정보 보호 예산안만 5,231억 원으로 올해보다 약 44% 증액된다. 구체적으로는 보안 특화 AI 모델에 700억 원, 차세대 보안 원천에 550억 원이 편성된다. 중소기업 1만 곳의 AI 보안 솔루션 제공을 돕는 데에도 500억 원이 잡힌다.
시장도 열리고 있다. 정부와 한국정보보호산업협회의 지난해 실태 조사에 따르면 국내 정보 보안 매출은 8조 원대로 매년 두 자릿수씩 불고 있다. 국내에서 공격을 방어한 경험과 노하우를 외국에도 전수할 수 있는 서비스를 내는 것이 업계가 풀어야 할 가장 큰 과제다. 글로벌 시장 공략 여부에 따라 우리나라 보안의 힘도 달라질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