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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촌(鹿邨) 고병익(高柄翊) [더 라이프이스트-현대인의 호(號)와 호시(號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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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촌(鹿邨) 고병익(高柄翊) [더 라이프이스트-현대인의 호(號)와 호시(號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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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필자는 “현대인의 호(號)와 호시(號詩)”를 본격적으로 연재하기에 앞서, 지금은 이 세상에 계시지 않지만 필자에게 많은 영향과 영감을 주신 세 분 선생님의 호시를 먼저 소개하고자 한다. 이 시들은 필자가 세 분께 헌정하는 호시이면서, 동시에 존경과 그리움을 담아 뒤늦게 부치는 편지이기도 하다.


    - AI가 생성한 이미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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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시]
    讚鹿邨總長(찬녹촌총장)

    巨擘硏鑽花滿發(거벽연찬화만발)
    史林文苑自成蹊(사림문원자성혜)
    白鹿忽離邨畔樹(백록홀리촌반수)
    千秋嘉蔭與前齊(천추가음여전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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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석]
    * 讚(찬) : 기리다, 칭송하다. / 鹿邨(녹촌) : 고병익(高柄翊) 선생의 아호. 선생이 태어난 문경(聞慶) 녹문리(鹿門里)에서 따온 것이다. / 總長(총장) : 선생이 서울대학교 총장을 지냈으므로 이렇게 불렀다.
    * 巨擘(거벽) : 엄지손가락. 여러 손가락 가운데 가장 크다는 데서, 어떤 분야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 곧 대가(大家)를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 硏鑽(연찬) : 학문을 깊이 연구하다. ‘硏’은 갈다, ‘鑽’은 뚫다라는 뜻으로, 갈고 파고들어 깊이 궁구함을 말한다. / 花滿發(화만발) : 꽃이 가득 피다. 오랜 연구가 풍성한 성과로 맺어진 것을 비유한 말이다.
    * 史林(사림) : 역사의 숲. 역사학계를 가리킨다. / 文苑(문원) : 문학의 동산. 문단이나 문학계를 가리킨다. / 自成蹊(자성혜) : 저절로 오솔길이 생기다. ‘蹊’는 사람이 다녀서 난 좁은 길이다. 『사기(史記)』 「이장군열전(李將軍列傳)」의 ‘桃李不言 下自成蹊(복숭아와 오얏이 말하지 않아도 그 아래에 저절로 오솔길이 생긴다.)’에서 따온 말로, 덕이 있는 사람은 스스로 내세우지 않아도 사람들이 절로 따르고 모여든다는 뜻이다.
    * 白鹿(백록) : 흰 사슴. 예로부터 신선이 타고 다니는 상서로운 짐승으로 여겨졌다. 여기서는 아호 ‘鹿邨’의 ‘鹿’ 자를 살려 선생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하였다. / 忽(홀) : 홀연히, 갑자기. / 離(리) : 떠나다. 세상을 떠남을 완곡하게 이른 말이다. / 邨畔樹(촌반수) : 마을 가의 나무. 마을 어귀에 서서 오가는 이들에게 그늘을 드리우는 큰 나무를 가리킨다. 아호 ‘鹿邨’의 ‘邨’ 자를 선생이 머무시던 세상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하였다. 나무는 선생이 남기신 학덕을 비유하는 말로 쓰였다.
    * 千秋(천추) : 천 년의 세월. 아주 오랜 세월을 뜻한다. / 嘉蔭(가음) : 아름다운 그늘. 선생이 평생 후학을 감싸 보살펴 준 덕을 비유하였으며, 추모집 『거목의 그늘』과도 뜻이 통한다. / 與前齊(여전제) : 예전과 같다. ‘與~齊’는 ‘~와 가지런하다’, 곧 ‘~와 같다’는 뜻이다. ‘齊’는 둘째 구의 ‘蹊’와 운(韻)을 이룬다.

    [번역]
    녹촌 총장님을 기리며


    대학자가 갈고 닦은 공이 꽃을 가득히 피워내자
    역사 숲과 문학 동산에 저절로 길이 만들어졌네
    흰 사슴이 마을 어귀 나무 곁을 홀연히 떠났지만
    천추의 세월에도 아름다운 그늘은 예전과 같으리

    [해설]
    녹촌(鹿邨)은 고병익(高柄翊) 선생의 아호로, 선생께서 태어나신 문경(聞慶) 녹문리(鹿門里)에서 따온 것이다. 선생께서는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를 거쳐 서울대 총장과 한국정신문화연구원장을 지내셨고, 만년에는 한시에 심취하여 시집 두 권을 남기셨다. 이 시는 필자가 선생의 삶과 함께 아호를 시 속에 담아 지어 올린 호시(號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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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 구에서는 큰 학자가 평생 갈고닦은 학문이 마침내 꽃으로 활짝 피어났음을 노래하였다. 둘째 구에는 사마천(司馬遷)이 『사기(史記)』에서 이광(李廣) 장군을 기리며 인용한 “복숭아와 오얏이 말하지 않아도 그 아래에 저절로 길이 생긴다[桃李不言 下自成蹊]”는 옛말의 뜻을 담았다. 꽃이 곱고 열매가 달면 부르지 않아도 사람들이 찾아와 자연히 길이 생겨난다는 말이다. 선생께서는 스스로를 내세우지 않으셨지만, 역사의 숲과 문학의 동산에는 선생을 따르는 후학들의 발걸음으로 저절로 길이 났다.

    셋째 구의 ‘흰 사슴’은 ‘녹촌’의 사슴이자 곧 선생이시다. 필자는 선생의 서세(逝世)를 상서로운 사슴이 마을을 떠난 것으로 묘사하였는데, 여기서의 마을은 선생께서 머무시던 이 세상을 비유한 말이다. ‘사슴’과 ‘마을’이 곧 ‘녹촌’의 두 글자이니, 아호가 이 한 구에 온전히 깃들게 되었다. 이제 사슴은 홀연히 떠났지만 마을 어귀 나무는 그대로 남아 있다. 그리하여 필자는 선생의 제자들이 추모집에 『거목의 그늘』이라는 이름을 붙였듯이, 그 나무가 드리운 아름다운 그늘, 곧 후학을 감싸준 선생의 학덕은 천 년이 흘러도 예전과 다름없으리라는 믿음으로 시를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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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는 선생을 단 한 번도 직접 뵌 적이 없다. 그러나 선생의 한시를 두 권의 책으로 옮기는 동안 숱한 행간(行間)에서 선생을 마주했으니, 수백 번도 넘게 뵈었다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선생을 향한 발걸음으로 저절로 난 그 길 위에 이제 필자도 서 있다. 거목의 그늘이 생전에 뵙지 못한 필자에게까지 고요히 드리워진다.

    2026. 11.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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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경닷컴 The Lifeist> 태헌(太獻) 강성위(姜聲尉)(hanshi@naver.com)

    "외부 필진의 기고 내용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독자 문의 : thepe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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