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의 삶이란 백사장의 작은 모래알과 같아서 몰아치는 시대라는 파도에 휩쓸려 잠기곤 한다. 그래서 어떤 이의 인생은 하나의 커다란 비극의 일부로 뭉뚱그려지고, 생의 그릇에 함께 담겼던 기쁨과 슬픔, 꿈과 사랑은 쉽게 잊힌다.그렇다면 사람은 무엇으로 남을까. 얼마나 잘 살았는지, 무얼 이뤘는지보다 중요한 건 세상에 존재했음을 기억하는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일지 모른다. 21일 개봉하는 송일곤 감독의 신작이자 배우 김혜자의 스크린 복귀작 ‘여전히 찬란하게’는 이런 작지만 소중한 기억에 관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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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얼개는 특별하지 않다. 경상북도 산골에서 나고 자란 열일곱살 정임(최주은)과 순옥(박서경)은 산과 들을 누비며 노래한다. 언젠가 서울에서 정임은 최고의 가수가 되고, 순옥은 그를 무대에 올리는 단장이 될 거란 꿈을 키운다. 하지만 정임이가 홀로 일제의 위안부에 동원되며 좌절된다.
익숙한 역사극 소재다. 흥미로운 것은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방식이다. 영화는 비극의 순간보다 그 이전에 존재했던 소녀들의 행복한 시간에 더 오래 머물러 있다. 송 감독이 낭독극 형식의 짧은 대본에서 영감을 얻어 영화 시나리오로 발전시켰다는 점은 이런 접근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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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사는 세 개의 시간을 포인트로 이뤄진다. 1942년과 1991년 그리고 2010년이다. 1942년은 일제의 수탈이 극심해지던 시기였고 1991년은 위안부 피해자 고(故) 김학순 할머니가 최초로 공개 증언에 나선 해다. 어느덧 60대가 된 순옥과 정임이 서울에서 열리는 노래자랑에 나가려는 모습을 풀어낸다.
반전은 순옥의 기억이 허구라는 사실이다. 일본군에 끌려간 단짝 친구 정임은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 함께 노래자랑 무대에 서겠다는 희망은 치매를 앓는 2010년 여든다섯의 노인 순옥의 머릿 속에만 있다. 나이를 먹을수록 힘겹게 붙잡고 있는 기억이 희미해질 수 있다는 두려움, 정임을 기억해야 한다는 책임감이 순옥의 시간을 가둔 것이다.
영화 곳곳에 등장하는 뮤지컬 요소가 독특하다. 경쾌한 노래와 춤이 어우러지며 영화는 한 편의 동화 같은 분위기를 자아낸다. 한국 영화에서 흔한 연출이 아닌 데다, 종종 서사의 흐름이 끊긴다고 느낄 수 있어 호불호는 갈릴 만하다.
앞서 부산국제영화제 현장에서 만난 송 감독은 이를 두고 “다큐멘터리처럼 사회·정치적 관계를 중심으로 다룰 수도 있겠지만, 관객들이 조금 다르게 경험하길 바랐다”며 “영화 속에 연민과 슬픔, 측은함과 기쁨 같은 감정을 담아내고 싶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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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년 만에 스크린에 돌아온 김혜자의 존재감은 영화 제목처럼 압권이다. 유독 클로즈업이 많은 영화의 장면 연출과 어우러져 몰입감이 느껴진다. 송 감독에 따르면 당초 김혜자는 출연을 망설였다. ‘집 앞의 들꽃처럼 조용히 지내고 싶다’는 이유에서다. 그러나 시나리오 속 슬프지만 아름다운 이야기에 마음을 움직인 김혜자에게서 결국 “내가 출연하는 게 선한 영향력을 줄 수 있다면 하겠다”는 답을 받았다. 김혜자는 영화를 찍으면서 “참 따뜻하고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고 말했다고 한다.
국내 주요 건설사인 대우건설이 자회사 스튜디오 푸르지오를 세워 처음 투자한 작품이란 점이 눈길을 끈다. 상업성보다 작품성과 예술성을 중시하는 투자 기조에서 고른 작품이다. ‘여전히 찬란하게’가 흥행 성과를 내면 투자 경색으로 신음하는 국내 독립 영화판에 활기를 불어넣을 수도 있다는 기대감이 영화계에서 나오는 이유다. 11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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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승목 기자
※배우 김혜자의 연기 인생을 돌아보는 심층 인터뷰는 오는 30일 발간되는 아르떼 매거진 11월호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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