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 ‘오디세이’에는 약 2억5000만 달러의 제작비가 들어갔다. 오디세우스의 배는 실제 항해가 가능한 목조함 ‘드라켄’을 썼고, 높이 10.7m의 트로이 목마도 실물로 제작했다. 사람들이 영화에 열광한 이유는 AI가 빠르게 결과물을 내는 시대에 결과 자체보다 그 뒤에 들어간 인간의 수고와 노력에 프리미엄을 느꼈기 때문이다. 사람이 무엇을 경험하고 선택했는지, 어떤 판단을 내리고 어떻게 책임졌는지가 차별화 요소가 되는 것이다. AI 자동화의 시대에 인간의 흔적을 차별화 자산으로 전환하는 전략을 ‘휴먼엣지(human edge)’라 한다. 사람의 흔적과 감각이 경쟁력

휴먼엣지의 양상은 다양하다. 먼저 ‘결점의 엣지’다. 매끈한 완벽함 대신 인간의 취약성을 드러내 진정성을 전하는 방식이다. 도브(Dove)는 2024년 4월 ‘리얼 뷰티’ 캠페인 20주년을 맞아 “여성의 외모를 표현하는 데 AI를 절대 사용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고화질 무결점의 미학으로 경쟁해온 뷰티 업계에서 AI 없는 진짜 얼굴을 보여주겠다는 약속 자체가 신뢰가 된 셈이다.
두 번째는 ‘과정의 엣지’다. 결과 뒤에 있는 판단과 시행착오, 검증·책임의 이력을 보여준다. 가전 제조사 다이슨(Dyson)의 창립자 제임스 다이슨은 먼지봉투 없는 진공청소기를 완성하기까지 약 5년에 걸쳐 5127개의 시제품을 제작했다. 다이슨은 최종 완성품에 이르기까지 거친 시제품들의 이 같은 제작 이력을 공개했다. 이 숫자는 고생을 과시하는 것이 아니라 최종 제품이 수많은 실험과 수정, 판단을 거쳐 나왔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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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번째는 ‘손길의 엣지’다. AI가 반복 업무를 맡을수록 사람의 섬세한 조율과 직접적인 감각이 차별화 요소로 떠오른다. 포시즌스 호텔 쿠알라룸푸르는 AI 기반 체크인, 40개 이상 언어의 실시간 통역, AI 홀로그램 진행자, 자동 영상 편집 기술 등을 도입했다. 기계가 업무 부담을 줄여준 만큼 전담 직원은 고객의 취향에 맞춰 메뉴와 장식, 음악, 행사 분위기를 조율하는 데 집중한다. AI가 인간의 손길을 ‘대체(replace)’하기보다 정교하게 ‘보완(refine)’하는 수단으로 활용한 예다.
마지막은 ‘우연의 엣지’다. 알고리즘이 만든 예측 가능한 경로에서 벗어나 뜻밖의 발견이 가능할 때, 사람들은 흥미를 느낀다. 스포티파이의 ‘매주 발견하기(Discover Weekly)’는 청취 이력을 바탕으로 아직 듣지 않은 곡과 아티스트를 추천한다. 서비스 출시 10주년인 2025년까지 이 서비스에서 1000억 곡 이상이 재생됐고, 매주 5600만 건 이상의 새로운 아티스트 발견이 이뤄졌다. 개인화의 목표를 ‘이미 익숙하거나 더 비슷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발견’으로 확장한 사례다.
AI는 효율을, 인간은 선택·책임을
휴먼엣지가 부상하는 배경에는 AI 결과물의 범람이 있다. 메리엄 웹스터는 AI가 대량 생성한 저품질 콘텐츠를 뜻하는 ‘슬롭(slop)’을 2025년 올해의 단어로 선정했다. 겉 보기엔 그럴듯하지만 내용이 부실해 동료에게 재작업을 떠넘기는 ‘워크슬롭(workslop)’을 경험했다는 미국 사무직 근로자도 약 40%에 이른다. AI의 결과를 어디까지 믿을지 경계가 불분명해질수록 검증하고 취사선택해 결정한 뒤 책임지는 인간의 역할은 더 중요해질 수밖에 없다.ADVERTISEMENT
휴먼엣지는 기술을 거부하자는 주장이 아니다. AI가 잘 처리할 수 있는 일은 맡기되, 신뢰와 책임이 중요한 순간에는 인간의 흔적을 남기자는 것이다. 미국의 대표적인 보온병 및 텀블러 제조 브랜드인 스탠리(Stanley 1913)는 공급망과 운영에는 AI 분석을 활용하면서도 소비자와 직접 만나는 광고 크리에이티브에는 생성형 AI를 쓰지 않는다는 원칙을 정했다. 보이지 않는 백엔드에서는 AI로 효율을 높이고, 고객 접점인 프런트엔드에서는 휴먼엣지를 발휘하는 방식이다.
그렇다면 기업이 던질 질문도 달라져야 한다. ‘무엇을 자동화할 것인가’를 넘어 ‘AI가 할 수 있어도 사람이 해야 더 가치 있는 것은 무엇인가’를 물어야 한다. 기계가 할 수 있는 일이 많아질수록 인간의 흔적은 희소해진다. 그 흔적이 필요한 순간을 제품과 서비스에 구체적으로 담아내는 기업이 소비자에게 차별화된 가치를 제공할 수 있다.
최지혜 서울대 소비트렌드분석센터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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