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주 한 잔을 만나러 가는 길에 강을 건넜다.
지난 달, 진맥소주의 오픈하우스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경북 안동의 맹개마을을 찾았다. 앞으로는 낙동강이 흐르고 뒤로는 청량산 자락이 둘러싼 곳이다. 마을에 들어가려면 먼저 강의 사정을 살펴야 한다. 징검다리를 건널 수 있는 날도 있지만, 물이 불어나면 트랙터의 힘을 빌려야 한다. 내가 도착한 날에는 강물이 불어 있었다. 지인의 지프에 올라 물길을 건넜다. 차체가 덜컹거릴 때마다 몸도 함께 흔들렸다. 창밖으로 흐르는 물과 산을 바라보며, 술을 만나기 전에 그 술이 태어난 자연부터 만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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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건너에는 하얀 메밀꽃이 기다리고 있었다. 9월의 맹개마을은 온통 꽃밭이었다. 짙은 청량산 자락 앞에 펼쳐진 흰 꽃들이 빛을 받아 일렁였다. 영화 속 장면으로 들어온 듯했다. 밀을 수확한 땅에 메밀을 심어 한 해의 농사를 이어간다고 했다. 진맥소주를 만드는 밀은 이미 거둬들인 뒤였지만, 그 자리를 채운 메밀꽃 덕분에 이곳의 술이 농사의 시간 속에 있다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었다.
진맥소주는 이곳에서 직접 유기농으로 재배한 우리밀 100%로 빚는다. 이름에도 밀의 흔적이 남아 있다. ‘진맥(眞麥)’은 밀을 가리키는 옛말이다. 16세기 조선 시대에 김유가 쓰고 훗날 손자 김령이 보완한 조리서 『수운잡방』에는 ‘진맥소주’라는 이름과 밀로 소주를 만드는 방법이 남아 있다. 진맥소주를 만드는 맹개술도가는 이 기록을 바탕으로 밀소주를 되살리고, 옛 술의 이름을 이어받았다고 설명한다. 문헌 속에서 읽던 술이 다시 밭과 증류실을 거쳐 잔에 담기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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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과정에는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하다. 3주간 저온에서 발효한 뒤 동증류기로 두 차례 증류하고, 옹기와 스테인리스 용기에서 최소 1년을 숙성한다. 밀을 거두었다고 곧장 술을 내놓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발효와 증류를 거쳐 충분히 쉬어가는 시간까지 필요하다. 꽃밭에서는 계절이 바뀌고, 그 곁에서는 술이 천천히 제 모습을 갖춰간다.
이날 마을에는 진맥소주를 응원하는 사람들이 모였다. 여러 셰프가 참여한 푸드 마켓에는 한식부터 중식까지 다채로운 음식이 차려졌다. 각자의 주방에서 맹개마을까지 찾아온 셰프들의 음식에 진맥소주를 곁들이니, 평소 익숙하게 마시던 소주의 자리가 한층 넓어지는 듯했다.
밤에는 증류실에서 디제이 파티가 열렸다. 특히 하이브리드 증류기 위 천장으로 펼쳐지는 그래픽이 인상적이었다. 빛과 색이 공간에 번지고, 시간대마다 달라지는 음악이 그 위를 채웠다. 평소 증류실을 견학할 때면 가동 중인 기계의 열기와 소리, 막 만들어지는 술의 향에 집중하곤 한다. 그날 밤 증류기는 쉬고 있었다. 대신 음악이 흐르고 사람들이 움직였다. 음악에 몸을 맡긴 이들 뒤로 증류기가 보였다. 익숙한 설비를 눈앞에 두고도 전혀 다른 공간에 온 듯했다.

술을 만드는 공간에서 그 술을 마시며 춤을 추는 밤. 평소라면 설명을 듣고 사진을 찍은 뒤 떠났을 증류실에 오래 머물렀다. 술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아는 것과, 그곳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은 서로 다른 기억을 남긴다. 그날의 음악과 조명은 진맥소주를 떠올릴 때 함께 따라올 풍경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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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깊어갈 무렵, 진맥소주의 마스터 디스틸러인 박성호 이사를 만났다. 증류실 뒤편에서 메밀밭으로 이어지는 쪽에 술을 만들고 남은 밀 찌꺼기를 거름으로 활용하는 곳이 있다고 했다. 코끝에 닿는 냄새가 꽤 강렬했다. 꽃밭의 낭만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농사와 술 만들기의 또 다른 얼굴이었다.
스코틀랜드에서도 몰트 찌꺼기를 소 사료로 보내거나, 증류 후 남은 부산물을 농업용 비료로 활용하는 모습을 접한 적이 있다. 맹개마을에서는 밀을 키운 땅과 술을 만드는 공간, 남은 것을 다시 받아들이는 밭이 가까이 이어져 있었다. 술지게미는 퇴비로 돌아간다. 맹개술도가에 따르면 증류에 사용한 물도 마을의 온수로 재활용한다. 마을의 전력에는 태양광도 활용한다. 지속가능성이라는 말이 이곳에서는 거름과 따뜻한 물, 전기의 형태를 하고 있었다. 잠시 코를 찡그리면서도, 이곳에서 말하는 자연이 얼마나 구체적인 것인지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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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가장 자주 마신 술은 진맥소주 40도였다. 상온에서는 버터와 크림을 떠올리게 하는 고소하고 부드러운 풍미에 풀 향이 겹쳐졌다. 은은한 단맛이 이어지고, 끝에는 후추 같은 여운이 남았다. 이것이 밀로 빚은 소주의 표정일까. 얼음을 넣었을 때는 내 입에 조금 더 스파이시하게 다가왔다. 같은 술을 온도를 달리해 마시며, 음식과 대화 사이에서 천천히 그 차이를 즐겼다.

함께 자리한 셰프와 교수 등 여러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시간이 훌쩍 흘렀다. 소주를 마시며 이야기꽃을 피우고 밤을 지새운 것은 참 오랜만이었다. 자리에 모인 이들 가운데는 서울에서 먼 길을 온 사람이 많았다. 기차로 안동까지 내려와 다시 차를 타고 이동한 뒤, 마지막에는 강까지 건너야 닿는 곳이다. 그 수고를 마다하지 않고 한자리에 모였다는 사실이 마음에 남았다. 진맥소주를 좋아하는 마음, 맹개마을이 그려갈 미래를 응원하는 마음이 그 밤의 대화에 스며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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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아침에는 김선영 대표가 끓여준 북엇국을 먹었다. 야외에 앉으니 메밀꽃이 보이고 햇볕이 내려앉았다. 숙취는 없었지만 따뜻한 국물이 반가웠다. 밤새 술을 나누던 사람들과 아침에는 국 한 그릇을 앞에 두고 앉았다. 전날 밤의 흥겨움이 차분한 아침으로 이어졌다. 먼 길을 찾아온 손님을 먹이고 보내는 마음이 그 한 그릇에 담겨 있었다.
식사를 마친 뒤에는 한 연주자가 메밀밭에서 연주를 시작했다. 둥근 금속판 두 개를 맞붙인 듯한 악기, 핸드팬이었다. 손가락으로 표면을 두드리자 맑은 음과 리듬이 함께 흘러나왔다. 낯선 울림이 꽃밭 위로 퍼졌다. 전날 밤 증류실을 채웠던 음악과는 사뭇 달랐다. 아침 햇볕 아래에서 그 소리를 듣고 있자니, 온 마을과 그곳에 모인 사람들이 함께 이 땅을 축복하는 것 같았다.

떠나기 전에는 숙성고에도 잠시 들렀다. 오크통 안에서 시간을 보내는 원액들을 살펴보았다. 진맥소주에는 오크통에서 숙성한 ‘시인의 바위’라는 술도 있다. 밀로 빚은 소주가 나무와 만나 얻는 풍미는 또 다른 즐거움이다. 지금 이곳에서 숙성 중인 술들은 앞으로 어떤 표정으로 잔에 담길까. 바깥에서는 밀과 메밀이 계절을 이어가고, 안에서는 술이 나무와 함께 시간을 보낸다. 다시 맹개마을에 와야 할 이유가 하나 더 생겼다.
마을을 나설 때에는 박성호 이사가 직접 트랙터를 몰았다. 손님들을 가득 태운 트랙터가 낙동강을 건넜다. 전날 지프를 타고 들어왔던 물길을, 이번에는 술을 빚는 사람의 배웅을 받으며 건넜다. 강 건너까지 손님을 데려다주는 그의 모습이 오래 마음에 남았다.
나는 해외의 유명 양조장이나 증류소를 방문할 때면 그들이 손님을 맞이하는 방식을 유심히 살핀다. 공간을 보여주는 순서, 시음으로 이어지는 이야기, 식사와 숙박이 연결되는 방식까지 기록한다. 좋은 사례를 만나면 감탄하고, 우리 술의 현장에도 적용할 수 있을지 생각하곤 한다. 오랜 역사를 가진 브랜드가 자신의 세계를 경험하게 하는 방식에서 배울 점은 많다.
맹개마을의 환대는 이곳의 생활에서 비롯됐다. 함께 술을 나누던 밤, 다음 날 아침 김선영 대표가 끓여준 북엇국, 손님을 태우고 직접 강을 건너 배웅하던 박성호 이사. 손님을 맞고 보내는 일이 마을에서 살아가는 방식과 맞닿아 있었다. 강의 사정을 살피고, 음식을 준비하고, 사람을 태워 물길을 건너는 일. 그 환대에는 맹개마을을 가꾸며 살아온 사람들의 시간이 배어 있었다.
직접 키운 유기농 밀로 술을 만든다는 설명은 병의 라벨에서도 읽을 수 있다. 그러나 강을 건너고, 꽃밭을 걷고, 술을 만들고 남은 밀 찌꺼기의 냄새를 맡은 뒤에는 그 문장이 조금 다르게 다가온다. 농사를 짓고 술을 빚으며 이곳을 지키는 일이 한 잔 안에 함께 담겨 있다는 것을 몸으로 알게 된다. 진맥소주와 한 걸음 더 가까워진 기분이었다.
한국 술의 다음 장은 어디에서 시작될까. 맹개마을에서는 그 질문에 풍경과 사람들이 답하고 있었다. 옛 기록에서 술을 되살리고, 계절에 따라 밭을 가꾸고, 자신들이 빚은 술 곁에 음식과 음악을 펼쳐놓는 일. 그리고 그곳까지 찾아온 사람을 따뜻하게 맞이하는 일. 이곳의 자연과 생활에서 길어 올린 경험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였다.
돌아와서도 그날 아침의 북엇국과 메밀밭에 퍼지던 소리가 자꾸 떠오른다. 앞으로 진맥소주를 잔에 따르면, 낙동강을 건너던 그 순간이 향기로 피어오를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