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반 동안 '일머리가 없다, 깊이가 없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번 평가에서 최하 등급을 받았고 몇 달 안에 달라지지 않으면 함께하기 어렵다는 말까지 들었습니다."한 정보기술(IT) 회사 5년 차 직장인 A씨는 리멤버 커뮤니티를 통해 이 같은 사연을 털어놨다. 보고할 때마다 리더에게 질책을 들으면서 자존감은 바닥으로 떨어졌다는 것. 이 게시글은 회사가 매긴 성적표를 자신의 한계로 받아들여야 할지 고민하는 직장인들 사이에서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저성과자 평가, '조용한 해고' 도구로 활용"
2일 비즈니스 네트워크 서비스 리멤버에 따르면 최근 기준이 불분명한 저성과자 평가와 '저성과자 성과 향상 프로그램(PIP)'이 "조용한 해고의 도구로 활용되고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지는 추세다.ADVERTISEMENT
평가에 대한 불신은 적당히 일하면서 이직을 모색하는 '조용한 환승'의 배경이 되고 있다. 리멤버 커뮤니티에서 직장인 3469명이 참여한 설문조사에서도 이 같은 현상이 포착됐다. 이 조사는 '핵심인재로 살기 vs 적당히 살기'를 주제로 진행됐는데 "저성과자 고과를 돌아가며 받더라도 적당히 일하겠다"는 응답이 58%(2002명)로 "핵심인재로 살겠다"(42%)는 답을 앞질렀다. '조용한 환승'을 준비하면서 다른 회사에서도 통할 경력과 실력을 쌓아두는 직장인들의 생존법이 주목받게 된 이유다.
한 직장인은 "남들이 기피하는 프로젝트까지 도맡아 2인분, 3인분의 성과를 냈는데 결과는 정치질 잘하고 요령 피우는 동료와 별반 다르지 않은 고과였다"고 토로했다. 이처럼 열심히 일해도 평가가 성과에 비례하지 않았던 경험들은 누적되면서 직장생활 태도와 방식을 바꾸는 계기가 된다는 분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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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가를 향한 불신을 키우는 요인으로는 '상대평가 강제 할당'이 지목된다. 팀에서 에이스로 통하더라도 평가 전 "이번 고과는 OOO에게 몰아주자"는 암묵적 합의가 이뤄지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일정 인원에게 하위 등급을 줘야 하는 구조에선 팀 전체가 뛰어난 성과를 내도 누군가는 저성과자로 분류될 수밖에 없다.
'조용한 해고'에 맞선 직장인들 '조용한 환승'
저성과자로 분류된 이후엔 '조용한 해고'를 맞딱뜨리게 된다. PIP를 통해 부족한 면을 개선하려 해도 현실에선 이를 쉽사리 허용하지 않는 사례가 많다는 것. 리멤버는 "원래 PIP는 부족한 부분을 함께 찾아 개선하자는 제도지만 현장에선 저성과자 비율을 맞추거나 퇴사를 유도하기 위한 '절차적 포장'으로 쓰인다는 인식이 만연하다"고 지적했다.사내 평가를 최종 성적표로 받아들이지 않은 직장인들은 회사 밖으로 시선을 돌리고 있다. A씨는 게시글을 올리고 1년 뒤 "헤드헌터의 제안으로 더 좋은 조건의 회사로 옮겨 팀장급으로 일하고 있다"고 알렸다. 그는 "지금 그 회사가, 그 위치가 당신과 맞지 않는 것일 뿐, 당신이 전적으로 못난 것이 아니다. 이건 위로가 아니라 확신"이라고 강조했다.
PIP를 거쳐 퇴사했던 한 직장인도 한 달간 이직을 준비해 건실한 중견기업에 합격한 소식을 공유했다. 그는 "좋은 동료와 상사를 만나 잘 적응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직을 적극적으로 준비하지 않더라도 '조용한 환승'을 염두에 두다 보면 손을 내미는 기업들이 생기기 마련이다. 실제 리멤버에서 이직 의향을 '없음'으로 설정한 직장인들이 지난해 받은 스카웃 제안 수락률은 13.7%로 나타났다. 이들이 수락한 제안 건수는 2년 전보다 32% 늘었다. 사내 평가가 아니더라도 스카웃 제안을 통해 회사 밖에서 평가받는 자신의 가치를 확인할 기회가 열려 있는 셈이다.
'PIP 생존법'도 공유…"평가 다음 수 고민해야"
물론 당장은 저성과자 낙인 이후의 생존법이 중요하다. 현직자들은 저성과자 통보 이후 세 단계에 걸쳐 대응하는 방안을 제안한다. 일단 '평가 구조'와 '자신의 실력'을 분리하는 것이 먼저다. 상대평가 강제 할당, 조직 개편, 바뀐 기준 중 무엇이 영향을 미쳤는지 살펴봐야 한다는 조언이다. 다만 수년간 여러 사람에게 같은 지적을 받았다면 실제로 보완이 필요한지 점검해야 한다.ADVERTISEMENT
다음은 기록이다. PIP 목표, 면담 내용, 업무에서 배제된 정황을 날짜별로 남기고 노무 전문가와 상담하라는 것이 골자다. 직장인들은 "사직서에 먼저 서명하면 절대 안 된다"고 입을 모은다. 그러면서 자신의 프로필을 최신 상태로 갱신하고 이직 의향을 '제안 시 고려'로 설정해 외부 평가를 살펴야 한다고 조언했다. 회사에 남을지, 떠날지 결정하려면 선택의 기회가 있어야 해서다.
리멤버 관계자는 "저성과자 통보는 누구에게나 아프지만 그것은 그 회사, 그 자리, 그 해의 성적표일 뿐 내 커리어 전체의 성적표는 아니다"라며 "중요한 것은 낙인에 갇히지 않고 평가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냉정하게 들여다본 뒤 다음 수를 두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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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회사의 C등급은 지나간 1년에 대한 한 조직의 판단일 뿐으로 다음 성적표는 시장이 매긴다"며 "우물 안 성적표에 흔들리기보다 시장에서 내 진짜 평가를 확인하는 것이 '조용한 해고'의 시대를 건너는 요즘 직장인들의 생존법"이라고 말했다.
홍민성/김대영 한경닷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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