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말레이시아가 한국산 고대역폭메모리(HBM)의 핵심 수출처로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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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BM이 포함되는 복합구조칩 집적회로의 말레이시아향 수출은 올해 1~8월 63억1424만달러로 5년 만에 약 200배 불어났다. 삼성전자·SK하이닉스가 만든 HBM을 미국도 대만도 아닌 말레이시아로 수출하는 이유는 첨단반도체 후공정 작업 때문이다.
인공지능(AI) 반도체 수요가 폭증하면서 대만 TSMC의 첨단 패키징 공정 주문이 포화 상태에 이르자 말레이시아가 넘치는 물량을 흡수하며 성장하고 있다. 올해 말레이시아향 복합구조칩 집적회로 수출액은 8개월 만에 지난해 연간 수출액의 두 배를 넘어섰고 첨단 패키징 중심지인 대만향의 절반 수준까지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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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경 연세대 디지털통상연구센터 교수는 “반도체 산업 전체의 수요가 급격하게 커지면서 기존 생산거점이 소화하지 못한 물량이 설비와 생산능력을 갖춘 지역으로 분산되고 있다”며 “한국이 늘어난 메모리 반도체 수요를 모두 감당하지 못해 일부 물량이 중국으로 넘어가는 것처럼 말레이시아뿐 아니라 싱가포르·태국·베트남 등 동남아 지역의 교역도 함께 늘고 있다”고 말했다. 과도하게 증가한 수요가 여러 생산거점으로 흘러넘치는 현상이라는 의미다.
대만이 소화 못한 AI칩…‘실리콘 페낭’으로

해가 뜨기도 전인 오전 6시부터 페낭의 도로에는 차량 행렬이 늘어진다. 반도체 산업 단지 바얀레파스로 향하는 근무자들이다. 인텔과 AMD 등 글로벌 기업이 밀집한 산업단지는 출퇴근 시간을 분산하고 재택근무까지 병행해도 출퇴근 정체가 수시간 이어진다.
한국처럼 몇 년 사이 반도체 엔지니어들의 몸값이 급등했고 반도체 벨트를 따라 집값도 올랐다. 디엣지(The Edge)에 따르면 2026년 1분기 페낭 주택시장 거래량은 전년 동기 대비 19%, 거래금액은 67.8% 증가했다. 산업단지인 바얀레파스와 바투카완의 반도체·첨단제조 투자가 숙련인력을 끌어들이고 주변 주택 수요를 떠받치면서 집값은 지난해 1분기보다 8~10% 상승했다.
말레이시아가 단기간에 대안으로 부상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이미 반 세기 동안 구축해온 후공정 생태계가 있다. 말레이시아는 전 세계 반도체 조립·테스트·패키징 시장의 약 13%를 차지한다. 페낭과 쿨림을 중심으로 미국 인텔과 대만 ASE 계열사를 비롯한 글로벌 반도체 기업의 생산 기반이 밀집해 있다.
1970년대 초 미국과 일본 반도체 기업은 페낭에 거점을 세웠다. 비용 절감을 위해 노동집약적인 조립 공정을 해외로 옮기면서 내셔널세미컨덕터, 인텔, AMD, HP, 히타치 등이 잇따라 페낭에 진출했다. 말레이시아는 낮은 인건비와 자유무역지대의 세제·관세 혜택을 앞세워 글로벌 기업을 끌어들였다. 인텔은 1972년 페낭에 자사 최초의 미국 밖 생산시설인 반도체 조립공장을 세웠고 1979년에는 테스트 공정까지 추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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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들어 한국·대만·싱가포르·홍콩의 생산비용이 높아지면서 다국적기업의 후공정 투자는 말레이시아로 더 몰렸다. 1990~2000년대에는 외국계 기업에서 경험을 쌓은 현지 엔지니어들이 창업에 나서면서 현지 OSAT·테스트 업체가 성장했다.
2022년 말 챗GPT가 등장하면서 ‘값싸고 손이 많이 가는’ 일에 불과했던 후공정의 입지도 달라졌다. 과거 반도체 후공정은 웨이퍼에서 잘라낸 칩을 기판에 붙이고 포장·검사하는 마지막 단계로 여겨졌다. AI 가속기는 구조가 다르다. 한국이 만든 HBM과 엔비디아의 GPU를 하나의 기판 위에 연결하는 역할도 후공정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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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 칩과 HBM을 하나의 패키지 안에서 연결하는 대표 기술이 TSMC의 ‘CoWoS(Chip-on-Wafer-on-Substrate)’다. UBS 추정치에 따르면 글로벌 CoWoS 웨이퍼 수요는 2024년 35만8000장 수준에서 2027년에는 263만 장까지 늘어날 전망이다. 3년 만에 7배 이상으로 커지는 셈이다.
2026년만 보더라도 분기별 수요가 1분기 21만8000장에서 4분기 47만3000장으로 두 배 이상 증가한다. 엔비디아뿐만 아니라 구글, 아마존, 메타, 마이크로소프트 등 글로벌 빅테크들이 자체 AI 칩을 만들기 시작하면서 첨단 패키징 역량이 집중된 대만으로 주문이 몰렸다. 기존 생산능력만으로 이를 모두 소화하기 어려워지자 물량은 다른 후공정 거점으로 확산하기 시작했다.
인텔부터 AMD까지 다 있다

반도체 산업이 조용히 성장하던 말레이시아로 시선이 쏠린 건 처음이 아니다. 2021년 코로나19 확산으로 반도체 품귀 현상이 벌어지자 전 세계가 공급망의 병목을 찾기 시작했다. 2021년 반도체 쇼티지는 자동차 반도체로 시작된 반도체 품귀 현상이 스마트폰과 PC, 가전 등 다른 산업계로 이어지는 현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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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블룸버그는 말레이시아가 대만·한국·일본처럼 전공정 중심의 대표 반도체 국가로 인식되지는 않았지만 최근 몇 년 사이 반도체 테스트와 패키징의 주요 거점으로 성장했다고 설명했다. 인피니언, NXP, ST마이크로일렉트로닉스 등 차량용 반도체 주요 업체들의 현지 공장이 말레이시아에 있었고 코로나19 확산으로 현지 패키징·테스트 공장이 잇따라 멈춰서자 포드가 F-150 생산까지 중단했다.
고 교수는 “반도체 산업이 들어온 지 반세기 가까이 됐고 그동안 쌓인 설비와 인력, 생태계가 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수요를 받아낼 수 있었다”고 말했다.
수십 년간 후공정 생태계를 축적한 말레이시아의 전략적 가치도 함께 커지고 있다.
최근에는 기존 범용 조립·테스트에서 AI 반도체용 첨단 패키징으로 산업의 무게중심을 높이는 투자도 이어지고 있다. KOTRA 쿠알라룸푸르무역관에 따르면 2026년 상반기 페낭의 제조업 승인투자는 약 173억링깃(약 43억2500만달러)으로 이 가운데 외국인 투자가 약 128억링깃으로 74%를 차지했다. 최근 투자는 단순 조립공정에서 반도체 테스트장비와 자동화시스템, 정밀부품, 전공정 장비로 영역을 넓히고 있다.
말레이시아 정부의 국가반도체전략(NSS)도 이런 변화를 뒷받침하고 있다. 설계와 장비, 연구개발, 자동화 등 고부가가치 분야 투자를 확대하면서 페낭을 기존 후공정 생산기지에서 첨단 반도체 산업의 핵심 클러스터로 끌어올리겠다는 구상이다.
글로벌 반도체 기업의 투자도 올해까지 이어지고 있다. 대만 후공정 업체 칩본드는 지난 2월 페낭 바투카완에 약 2억달러를 들인 첨단 패키징 공장을 열었다. 웨이퍼 범핑과 WLCSP, 플립칩 패키징·테스트를 수행하는 공장으로 월 웨이퍼 1만 장 규모의 생산능력을 갖췄다.
ASE도 지난해 다섯 번째 공장을 연데 이어 올해 5월 아날로그디바이스의 페낭 제조시설을 인수하며 현지 패키징·테스트 생산망을 다시 확대했다. AMD와 중국 퉁푸마이크로일렉트로닉스의 합작사 TF-AMD도 약 50억링깃을 투입해 웨이퍼 범핑과 2.5D·FOED 등 첨단 패키징 역량을 확충하고 있다.
인텔도 페낭에서 첨단 패키징 투자를 본격화하고 있다. 현지 매체에 따르면 한 차례 가동이 미뤄졌던 페낭 첨단 패키징 공장은 지난해 말 기준 99% 완공됐으며 올해 안에 1단계 가동에 들어갈 예정이다.
이미혜 한국수출입은행 해외경제연구소 연구원은 “말레이시아의 반도체 후공정 산업은 앞으로도 계속 성장할 가능성이 높다”며 “미국이 자국 내 반도체 생산을 확대하는 동시에 일부 공정은 일본 등 동맹국과 우호국으로 분산하는 방식으로 글로벌 밸류체인을 재편해왔고 말레이시아뿐 아니라 베트남과 인도, 태국 등도 반도체 산업 육성을 위해 정책적 지원을 크게 늘리고 있는 만큼 동남아시아가 글로벌 공급망 대안으로 부상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영은 기자 kye0218@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