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ADVERTISEMENT
지난 7월 미국의 온라인 금융 플랫폼 로빈후드는 자체 블록체인인 로빈후드 체인의 메인넷을 공개했다. 주식과 상장지수펀드(ETF), 가상자산과 각종 디지털 금융 상품을 하나의 네트워크 위에서 거래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구상이었다.
로빈후드가 원하는 것은 단순한 상품 추가라기보다는, 금융 상품이 만들어지고 거래되고 결제되는 ‘레일’ 또는 인프라 자체를 소유하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현재 금융 시장은 상품마다 움직이는 방식이 다르다. 주식은 거래소와 증권사, 수탁기관 등을 거치고, 국가가 달라지면 거래 시간과 결제 방식, 규제도 모두 달라진다. 로빈후드 체인은 이 서로 다른 자산을 하나의 프로그래머블 인프라 위로 올리려는 실험이다.
ADVERTISEMENT
주식도 토큰화하면 24시간 거래 가능
대표적인 사례가 주식 토큰(stock token)이다. 로빈후드는 엔비디아, 애플 같은 미국 주식과 ETF의 가격에 연동되는 토큰을 발행하고 있다. 이 토큰은 실제 주식 그 자체는 아니다. 기초 주식에 대한 경제적 노출을 제공하는 별도의 금융 상품이다. 하지만 기술적으로는 일반적인 블록체인 토큰과 같은 방식으로 움직일 수 있다. 이는 단순히 24시간 거래할 수 있다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주식담보대출의 예를 들면, 기존에는 주식을 매수·보관한 후 담보로 잡고, 그 위에서 대출을 실행하는 과정이 각각 다른 시스템과 기관을 거쳐야 한다. 증권 계좌와 거래소, 수탁기관, 담보 관리 시스템이 서로 분리돼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블록체인상에서는 주식 토큰이 곧 바로 스마트 컨트랙트와 연결되면서, 여러 과정이 생략되고 서로 다른 금융 상품이 하나의 공통된 인터페이스를 갖게 된다.
ADVERTISEMENT
토큰화된 증권은 지갑으로 전송할 수 있고, 다른 디지털 자산과 결합할 수 있으며, 담보나 구조화 상품의 기초자산으로 활용될 가능성도 있다. 가령 엔비디아 주식에 연동된 토큰을 팔지 않고 담보로 맡겨 달러 스테이블코인을 빌리거나, 엔비디아 주식에서 애플 주식으로 바로 교환하는 일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흥미로운 일은 메인넷이 론칭된 뒤 벌어졌다. 로빈후드는 주식과 실물연계자산(RWA)을 위한 체인을 만들었지만, 초기 사용자들이 가장 적극적으로 거래한 것은 주식 토큰이 아니었다. 밈코인이었다. 로빈후드 체인 위에서 밈코인을 발행하고 거래하는 서비스들이 빠르게 등장했고, 이용자가 몰리면서 탈중앙화거래소 거래량도 급증했다. 한때 체인 전체 거래에서 밈코인이 큰 비중을 차지했다.
ADVERTISEMENT
전통 금융 회사의 관점에서 보면 예상 밖의 결과다. 주류 금융 시장의 자산을 블록체인 위로 옮기겠다고 만든 네트워크가 몇 주 만에 밈코인에 점령됐기 때문이다. 투기장이 돼 버린 현재 상황을 두고 건전한 현상이라고만 보기 어렵지만, 오히려 로빈후드 체인이 어떤 종류의 인프라인지를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다.
설계자의 의도를 벗어난 흥행
ADVERTISEMENT
개방형 블록체인에서는 플랫폼을 만든 회사가 모든 활용법을 미리 정하지 않는다. 인프라를 열어 두면 시장이 그 위에서 예상하지 못했던 서비스를 만든다. 예를 들어, 인터넷의 초기 시절 디씨인사이드는 본래 디지털카메라와 사진 정보를 공유하는 커뮤니티로 출발했지만, 이후 수많은 ‘갤러리’가 생겨나며 전혀 다른 성격의 인터넷 문화와 커뮤니티를 만들어냈다. 사람들이 자유롭게 모일 수 있는 공간을 먼저 만들었고, 그 공간의 실제 용도는 이용자들이 만들어 갔다.
로빈후드 체인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로빈후드는 주식 토큰을 중심으로 체인을 설계했지만, 실제 초기 수요는 밈코인과 고빈도 거래에서 먼저 나타났다. 중요한 것은 그런 투기적 수요조차 인프라 입장에서는 쓸모가 있다는 점이다. 사용자가 들어오면 지갑이 만들어지고, 스테이블코인이 이동하고, 탈중앙화거래소에 유동성이 쌓이고, 개발자가 따라 들어온다.
그리고 한 번 만들어진 이 유동성과 사용자 기반은 이후 전혀 다른 금융 상품에도 활용될 수 있다. 좋은 금융 상품이 먼저 나오고 사용자가 따라오는 것이 아니라, 먼저 사용자와 유동성이 모이고 그 위에 금융 상품이 올라가는 역전된 순서가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
게다가 로빈후드 체인이 예상 밖의 수요를 얻으면서 네트워크 자체가 상당한 수수료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지난 9월 초 밈코인 거래가 급증했을 당시 외부 분석에 따르면 로빈후드 체인 이용자들이 하루 동안 지급한 네트워크 수수료는 수백만 달러에 달했다.
물론 서버와 개발 인력, 네트워크 운영비가 있고, 기반 기술을 제공한 아비트럼과 수익을 나누는 구조도 있다. 로빈후드 역시 체인에서 발생하는 정확한 기업 매출을 별도로 공개하지 않았다. 다만 경영진은 실적 발표에서 체인 위의 거래가 새로운 수익원이 되고 있다는 점을 직접 언급했다.

투기가 만들어낸 진짜 매출
이에 따라 로빈후드의 향후 사업모델의 방향성도 조금 달라질 수 있다. 기존 금융사는 보통 규제당국의 허가를 받은 자산과 상품을 취급해 수익을 얻는다. 하지만 이러한 개방형 블록체인을 보유한 금융사는 상품 개발 및 소싱의 경계를 허물며 그 성장 잠재력을 성장시킬 수 있다.
누군가 밈코인을 만들고 거래하며, 탈중앙화거래소가 이를 처리하는 등의 활동이 모두 자신의 네트워크 위에서 일어난다면 인프라 사업자에게는 수익 기회가 된다. 어쩌면 로빈후드 체인에서 가장 흥미로운 상품은 토큰화 증권이 아니라 다양한 성격의 상품을 유연하게 규격화할 수 있는 ‘블록 공간’ 자체일지도 모른다.
최근 블록체인의 활용도를 두고 주요 금융사들이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고 있다. 주요 화두로 떠오른 RWA의 경우 개념적으로는 훌륭하지만, 어떤 자산을 토큰화해야 매력적일지, 그리고 현재 존재하지도 않는 시장을 어떻게 개척해야 할지 뚜렷한 해답이 없었다. 그런데 생각지 못한 방향에서 실마리가 나온 셈이다.
이 점은 한국 금융 회사에도 꽤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국내에서 토큰화 금융을 논의할 때는 대개 어떤 자산을 토큰 증권으로 만들 것인지부터 생각한다. 그러나 로빈후드의 실험에서 더 중요한 것은 개별 상품이 아닐 수 있다. 누가 금융자산이 움직이는 인프라의 주도권을 쥘 것인가의 문제다.
향후 주식과 채권, 펀드, 가상자산, 스테이블코인 등이 동일한 디지털 인프라 위에서 움직이기 시작한다면 경쟁력은 좋은 토큰화 상품 한두 개를 먼저 출시하는 데서 끝나지 않을 수 있다. 그 자산들이 거래되고, 담보가 되고, 다른 서비스와 결합될 수 있는 환경을 누가 제공하느냐가 더 중요해질 수 있다.

상품이 아니라 인프라를 파는 회사
상대적으로 보수적인 규제를 받는 한국 금융 회사들은 새로운 서비스를 만들 때 폐쇄형 시스템부터 고려하는 경향이 있다. 고객이 무엇을 할지 미리 정의하고, 허용된 기능만 제공하며, 완성된 금융 상품을 고객에게 전달하는 방식이다. 물론 금융에는 반드시 필요한 규제와 소비자 보호가 있다. 로빈후드의 주식 토큰 역시 실제 주식의 소유권이나 주주권을 주는 상품은 아니고, 최근 일부 기업들이 자사 주식을 기초로 한 토큰 상품에 불편한 입장을 공개하면서 법적·제도적 논쟁도 이어지고 있다.
다만 로빈후드 체인의 초기 모습은 오히려 금융 회사가 자산과 인프라를 제공하되 일정 부분을 개방했을 때 자신들이 예상하지 못했던 참여자와 서비스, 그리고 유동성이 생겨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시도가 젊은 세대와 저항정신을 대변하는 로빈후드이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일 수도 있다. 자체 메인넷 구축을 이미 고려한 금융사도 많이 있었겠지만, 골드만삭스가 했다면 결과는 달라졌을 수 있다. 무엇보다 아직 로빈후드 체인이 새로운 글로벌 금융 시장으로 자리 잡을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이 실험이 던지는 질문은 분명하다.
미래의 성공적인 금융사는 가장 좋은 금융 상품을 만드는 회사일까, 아니면 다양한 상품과 사용자가 모여드는 시장을 만드는 회사일까. 물론 모든 금융 회사가 로빈후드처럼 직접 블록체인을 만들 필요는 없다. 직접 시장을 만들기 어렵다면, 그 시장을 가장 잘 활용하는 것도 하나의 전략이다. 중요한 것은 블록체인을 단순히 새로운 상품을 올리는 기술로 볼 것인지, 아니면 새로운 금융 인프라와 유통망으로 볼 것인지부터 고민하는 것이다.
박태우 스페이스바 벤처스 대표 tw@spacebar.i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