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원순 한국경제신문 논설위원
[ 허원순 기자 ] [사설] '리디노미네이션' 앞서 경제체질 개선이 먼저다
경제 규모가 커지면서 간헐적으로 제기됐던 ‘리디노미네이션’(화폐 단위 변경) 주장이 국회 일각에서 다시 나오고 있다.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와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시기상조”라며 신중론을 내놓고 있지만, 더불어민주당의 기획재정위원회 소속 의원들이 논의의 중심에 있는 게 주목된다.
1000원을 새로운 1원 등으로 바꾸자는 주장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경(京) 단위 통계까지 나오면서 불편이 커지고, 미국 달러화 대비 원화 환율이 1000원 단위에서 비롯되는 ‘국격(國格)’ 문제도 있다. 돈 단위가 계속 커지면서 원화와 대한민국 이미지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부작용도 만만찮다. 화폐 단위 변경 비용, 물가 상승 자극이 대표적이다. 지금 같은 불황 국면에서는 효과도 장담하기 어렵다. 어제 한은이 기준금리를 동결하면서 2.6%로 전망했던 올해 성장률을 석 달 만에 더 낮출 정도로 경제 여건이 만만찮다.
파장이 메가톤급인 리디노미네이션 논의에 앞서야 할 일이 있다. 성장과 혁신 동력을 회복하며 장기 침체에서 조기에 벗어나는 것이다. 우리 경제가 성장궤도에 다시 오르도록 정책을 전면 재점검하고, 부문별 체질을 개선하는 게 더 시급하다. 국제 규준과 따로 가는 상법·공정거래법 개정 논의, 노조 쪽으로 계속 기울어지는 고용과 노사관계 법규, 지지부진한 규제 혁파 등 당장 궤도 수정이 필요한 현안이 쌓여 있다. 과도한 재정 팽창과 공공부문 비대화에 따른 보완책과 국제 경쟁의 첨단에 서 있는 기업들 기(氣)를 살려줄 전략도 시급하다.
당위론이나 긍정 측면만 보는 리디노미네이션을 경계한다. 자칫 우리 경제의 문제점과 ‘정책 리스크’까지 다 덮어버리는 블랙홀이 될 수도 있다. 편익은 제한적인데 비용은 과도하고 부작용도 분명한 만큼 시점을 잘 선택해야 한다. 국내외 불확실성이 커지는 판에 혼란을 부추길 이유가 없다. 내년 총선 등을 의식한 ‘정치적 계산’이 있어서는 곤란하다. 7년간 준비했던 터키 사례 등을 봐가며 국민적 공감을 형성하는 게 중요하다. <4월19일자 한국경제신문>
사설 읽기 포인트
화폐 단위의 액면 변경은
정치적 논리로 접근하면 안돼
한국은행도 '시기 상조'라며 경계
한국 돈 원화를 국내에서만 사용할 때는 불편함이나 특별한 점을 잘 모를 수 있다. 그러나 외국 통화와 수시로 교환해 쓴다거나 환율비교 시에는 사뭇 달라진다. 무엇보다 미국 달러 대비 환율이 1000원 단위가 되면서 원화의 대외 가치가 뚝 떨어진다. 단순히 이미지 이상의 문제다. 화폐는 국가가 보증하는 가장 중요한 신뢰 시스템이다. 결국 원화, 한국의 경제, 나아가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이미지 문제로 이어진다. ‘국격(國格)’이라는 에둘러 표현하는 말이 그 얘기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등 선진국 대열에서 한국 돈 원화처럼 화폐 단위가 부풀려 올라간 나라가 없다. 점심 한 끼에 1만원을 낸다면 0이 4개나 된다. 주요 경제통계 가운데는 억(億), 조(兆) 단위를 넘어 경(京)까지 나온다. 1경이면 0이 16개나 붙는다. 불편하기도 하고 오기(誤記)에 따른 오류 가능성도 있다. 불편함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래서 나온 논의가 화폐 단위의 액면 변경, 즉 리디노미네이션이다. 많은 나라가 하는 통화개혁이다. 우리나라도 과거 두 차례 단행한 적이 있다. 전쟁의 와중에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100원을 1환으로 바꿨고(1953년), 지하경제를 양성화하고 과도하게 많이 풀린 돈을 거둬들이기 위해 10환을 1원으로 다시 바꾼 적이 있다(1962년).
이런 배경에서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이 중심이 된 채 국회 일각에서 공개토론회를 열어 리디노미네이션의 공론화를 시도했다. 하지만 한때 필요성을 내비쳤던 한국은행도 막상 이 논의가 수면 위로 오르자 ‘시기상조’라며 강한 신중론을 피력했다. 행정부 내 경제팀장 격인 경제부총리도 한국은행과 같은 입장을 보였다. 필요성에는 공감하면서도 부작용이나 경제에 미치는 파장이 그만큼 큰 것을 잘 알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여당 국회의원들이 문제제기를 한 상황이니 이 논의가 쉽게 수그러들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부인에도 불구하고 한국은행은 오랫동안 이 문제를 연구해오기도 했다.
논의의 핵심은 리디노미네이션이 경제 이슈로 제기된 배경이나 노림수다. 순수하게 경제나 금융의 발전, 화폐의 안정성 차원의 문제로만 보기 힘든 징후가 있다. 가뜩이나 취약한 경제에 인위적인 충격을 줘서 판을 흔들어 보겠다거나 2020년과 2022년의 대형 선거와 연계한 의도가 있다면 더욱이나 경계의 대상이다. 가령 “리디노미네이션을 하면 지하경제가 다 양성화되고, 부자들은 현금을 노출시킬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식의 선동이 스며들 여지도 있기 때문이다. 불안 불투명 불확실은 경제를 위축시키는 해악 중의 해악인데, 인위적으로 이런 위험요인을 끌어들인다면 자해다.
물론 준비는 해야 한다. 비용도 많이 들고 준비 시간도 필요하다. 더 중요한 일은 장기침체에 깊이 빠져들고 있는 나라 경제를 위해 지금 시급히 해야 할 일을 제대로 하는 것이다. 경제의 체질을 바꾸고, 잘못된 정책은 수정하는 게 먼저라는 얘기다.
huhw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