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소확횡'의 비극

입력 2018-11-29 18:36
김선태 논설위원


[ 김선태 기자 ] 요즘 웬만한 회사에선 필기구, 복사용지 같은 사무용품은 공용으로 구매해 필요한 사람이 꺼내 쓰도록 하는 게 일반적이다. 그리 비싼 것도 아닌데 적잖은 직장인들이 이런 용품을 ‘슬쩍 챙긴’ 경험이 있을 것이다. 옷 갈아입을 때 빼놓은 볼펜이 집안에 몇 개씩 쌓이는 것은 애교에 속한다. 아이의 숙제나 개인 용도 문서를 회사 프린터로 출력하는 건 보통이다. 스테이플러나 프린터 용지 같은 회사 비품을 집에 가져다 쓰는 사람도 있다.

직장인 중 이런 ‘소확횡’(작지만 확실한 횡령)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사람이 몇이나 될까. ‘소확횡’은 어디까지가 해도 되는 것이고, 어디서부터 하면 안 되는 걸까. “까짓 거 몇 푼 한다고 쫀쫀하게 따지냐”고 할 수도 있지만 쌓이고 쌓이면 회사에서는 만만치 않은 비용이 빠져나간다.

공사(公私) 구분이 분명한 서양에선 이런 행위를 ‘직원 절도’(employee theft)로 규정하고 엄격하게 단속한다. 여기엔 몇 가지 유형이 있다. 앞에 든 사례는 ‘비품(supplies) 절도’에 해당한다. 비슷한 것으로 회사의 판매용 제품을 착복하는 ‘제품(merchandise) 절도’가 있다. ‘현금 절도’는 공금에 손을 대는 것인데 법인 카드를 사적 용도로 쓰는 것도 포함된다.

재밌는 건 ‘시간 절도’다. 근무시간에 온라인 쇼핑을 하거나 사적인 전화 또는 SNS를 하는 것, 흡연을 위해 자리를 비우는 것 등이다. 한국인의 평균 근로시간이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회원국 가운데 두 번째로 길다지만 ‘시간 절도’를 감안하면 순위가 한참 내려갈 것이다. 회사 전화로 근무 시간에 개인적 수다를 떨면 ‘비품 절도’와 ‘시간 절도’를 동시에 저지르는 것이 된다. 회사 기밀을 외부에 흘리는 것은 엄연한 ‘정보(information) 절도’다.

미국에서는 직원 절도로 인한 기업들의 손실이 연간 수백억달러에 달하며, 미국 기업의 20~30%가 직원 절도로 파산한다는 조사결과도 있다. 통제시스템을 구축해 최대한 예방하고 적발시 민·형사상 조치를 취하지만 근절은 거의 불가능한 모양이다. 한국에서는 공식 조사결과가 보고된 게 없지만, 공사 구분이 모호하고 온정주의에 취약한 기질을 감안하면 미국보다 피해가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 것 같다.

물리학계 석학으로 꼽히는 서울대 교수가 해외 출장비 1억8000만원을 횡령한 사실이 들통나 직위해제됐다는 소식이다. 허위 초청 이메일로 수차례 출장을 가고, 일과 무관한 곳에 출장비를 썼다고 한다. ‘현금 절도’에 ‘시간 절도’까지 저지른 셈이다. 직원 절도는 죄의식 없이 시작되는 게 보통이다. 하지만 적발이 어렵다보니 점점 대담해지고, 그러다가 바늘도둑이 소도둑이 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소확횡’을 경계해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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