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임기자 칼럼] 걱정스런 민주노총 '2003 데자뷔'

입력 2018-11-07 18:50
박기호 < 선임기자 겸 좋은일터연구소장 >


[ 박기호 기자 ] 노무현 대통령은 취임도 전에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사무실을 찾았다. 취임 첫해인 2003년 4월에는 파업에 들어간 철도노조에 ‘민영화 방침 철회’를 제시해 노정 합의를 이뤄냈다. 그로부터 두 달도 채 안 된 6월부터 노정 관계는 갈등 국면에 빠져들었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의 교육행정정보시스템(NEIS) 거부 투쟁, 화물연대의 불법 집단운송 거부, 공익사업장인 철도노조 파업 등은 노무현 정부로서도 수용 불가였던 까닭이다. 9월 노동부의 노사관계 개혁 방안 발표 이후 민주노총은 다른 길로 갔다. 노정 대립은 천문학적인 사회적 비용으로 이어졌다.

2003년 닮아 가는 2018년

촛불 정권 탄생 이후 민주노총 위상은 확연히 달라졌다. 노동 존중 분위기 속에서 채권 행사라도 하듯 노사 분쟁 곳곳에서 연전연승 중이다.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은 물론 삼성전자서비스와 포스코 등 무노조 기업에도 깃발을 꽂았다. 순풍에 돛 단 듯한 민주노총 행보가 최근 주춤하고 있다. 최저임금 산입 범위 확대와 탄력근로 확대를 둘러싸고 노정 간 대립이 두드러지는 양상이다. 민주노총은 약속을 지키라며 다음달 대규모 총파업을 예고하고 있다. 정권의 핵심 실세로 일컬어지는 임종석 대통령 비서실장 입에서 “민주노총과 전교조는 사회적 약자가 아니다”는 발언까지 나왔다.

민주노총을 둘러싼 작금의 노정 관계는 ‘2003 데자뷔’로 다가와 매우 걱정스럽다. 역사에 반면교사가 없다고 하지만 어떻게 똑같은 행태가 15년여 만에 재연되는지. 2003년 6월 이후의 노사정위원회와 2018년 11월 이후 경제사회노동위원회도 판박이가 될 처지다. 민주노총은 불참을 이유로 경사노위 위상을 축소하고 합의 내용도 지키지 않을 게 뻔하다. 2003년 6월 이후처럼 말이다.

탄력적 근로시간제 확대는 성수기 등에 근로시간을 늘릴 수 있는 기간을 현행 3개월에서 6개월 또는 1년으로 하자는 것이다. 주 52시간제 도입 이후 산업계가 생존 차원에서 요구해온 사항이다. 여·야·정이 협치 차원에서 확대키로 합의한 것은 국민과 산업계, 특히 향후 한국 경제의 앞날을 감안한 불가피한 선택이다. 국민과 여·야·정의 선택을 노동 탄압이라고 강변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다.

이제는 권리와 함께 의무도

우리의 노동법 체계에는 하나의 원칙이 깔려 있다. 노동자는 핍박받을 가능성이 높고, 사용자는 이윤 최대화를 추구하므로 법적·제도적 보호 장치가 필요하다는 점이다. 최저임금의 급격한 인상은 이 원칙을 깨뜨리는 것은 물론 역전 현상까지 가져왔다. 중소상공인들이 거리로 나선 것은 최저임금 인상으로 경제적 이익은 줄었는데도 형사범 처리 리스크는 커졌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민주노총이 산업계의 아우성과 사업주의 어려움을 모르쇠로 일관한다면 결과는 자명하다. 일자리 파이도 그만큼 줄어든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강경 투쟁을 계속한다면 노사 관계를 연구해온 학자들의 지적이 들어맞을 듯하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제왕적 행태를 즐기고 있다”는….

사회적 약자가 아니라면 누구라도 권리와 함께 의무를 갖는다. 자기 희생과 배려도 필요하다. 조합원들의 무분별한 요구를 걸러내고 비조합원과 함께 살아가도록 설득하는 집행부의 리더십이 절실하다. ‘2003 데자뷔’가 2018년에 현실이 된다면 노동계는 스스로를 외딴섬에 유폐하는 결과에 당면할 수밖에 없다. 노동 분야는 언제까지 대한민국의 국가경쟁력을 심각하게 저해하는 요소로 남을 것인지.

khpar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