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에서] 재벌 3세 갑질은 이사회 책임이다

입력 2018-04-18 17:23
갑질 사건마다 청와대로 가는 건 비정상적
법 제도 정비해 기업 이사회 작동하게 해야

유창재 마켓인사이트부 차장


[ 유창재 기자 ]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의 차녀 조현민 대한항공 전무의 이른바 ‘물컵 갑질’에 대한 비난 여론이 거세다. 대한항공 사명에서 ‘대한’이라는 이름을 뺏어야 한다는 청와대 청원이 줄을 잇는가 하면, 일부에선 대한항공 탑승반대 운동까지 벌어지고 있다. 여론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경찰은 사실관계를 규명하기 위한 내사에 착수했고, 일부 정치인은 조 전무를 특수폭행 혐의로 검찰에 고소하기도 했다.

한진그룹 3세의 잇단 일탈에 대한 사회적 분노는 이해할 만하다. 아버지뻘 임원에게 반말로 소리를 지르는 등 조 전무의 상식을 벗어난 갑질 행위는 오래전부터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2014년 ‘땅콩 회항’ 사건으로 회사를 떠났던 언니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은 최근 3년 만에 칼호텔네트워크 사장으로 슬그머니 복귀해 공분을 사고 있다.

하지만 청와대 청원이나 불매운동, 이에 편승한 정치인들의 비난 발언은 ‘집단 화풀이’일 뿐 재벌 3세 갑질과 전횡을 근절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청와대 청원부터 살펴보자. 대한항공은 1969년 조중훈 당시 한진상사 회장이 만성적자 상태인 국영 대한항공사를 인수해 민영화한 민간 회사다. 청와대가 사명 변경을 강제하는 것은 민간 기업에 대한 권한 남용이다. 브랜드 가치는 현금창출 능력과 직결되기 때문에 50여 년간 사용한 브랜드를 빼앗으면 기업 가치가 급락할 것이고, 청와대는 대한항공 소액주주들의 소송에 직면할 것이다. 청와대가 모든 것을 해결해줄 수 있다고 믿는 초등학생 수준의 시민의식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불매운동도 마찬가지다. 기업과 창업주 일가를 분리해서 생각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상장회사를 ‘내 회사’라고 여기는 일부 재벌의 수준과 다를 게 없다. 불매운동의 피해는 ‘오너 패밀리’보다 1만8000명에 달하는 대한항공 직원과 협력회사, 소액주주 등 이해관계자들에게 더 많이 돌아갈 것이다. 아무 죄가 없는 사람들이다.

재벌 2~3세의 갑질 등 일탈 사건이 터질 때마다 국민이 청와대, 검찰, 언론에 달려가 단죄를 요구하는 것은 비정상적이다. 왜 비정상적인 일이 반복될까? 정상적인 회사 내 견제장치가 작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바로 이사회다. 조 회장의 두 딸이 문제를 일으키면 이들을 해임해야 하는 것은 이사회다. 이사회는 회사와 주주에 대한 ‘선량한 관리자의 주의 의무’를 갖는다. 경영능력도 검증되지 않고 분노 조절도 안 되는 사람들이 창업자 3세라는 이유만으로 고위 임원을 맡아 기업 가치를 훼손하도록 방치한 것은 이사회의 책임이다.

대한항공은 9명의 이사 중 5명이 사외이사다. 외견상으로는 독립적이지만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고 있다.

이사회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이유는 한국에선 이사의 선관주의 의무가 유명무실하기 때문이다. 대한항공이 미국 회사였다면 소액주주들이 선관주의 의무 위반으로 이사들을 상대로 소송을 걸었을 것이다. 미국 기업의 이사회 이사들은 늘 소송의 위험에 노출돼 있어, 기업 가치를 훼손하는 의사결정을 내리지 않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한다.

하지만 한국에선 기업 가치 훼손의 입증 책임이 피고(이사)가 아니라 원고(소액주주)에게 있는 이유 등으로 이사회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할 유인이 적다. 법 제도를 정비해 이사회가 작동하게 해야 제2, 제3의 조현민을 막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