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지정 생존자'

입력 2018-02-01 18:04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첫 연두교서를 발표한 지난달 31일, 모든 각료가 현장에 모였지만 소니 퍼듀 농무장관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워싱턴DC 외곽의 비공개 장소에서 TV로 연설 장면을 지켜봤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한 ‘지정 생존자(designated survivor)’였기 때문이다.

‘지정 생존자’란 중대한 재난이나 테러 등 비상사태로 대통령과 대통령직 승계자들이 한꺼번에 변을 당할 경우 대통령 권한을 대행할 사람을 말한다. 같은 제목의 미국 인기 드라마에도 나왔듯이 서열과 상관없이 각료 중 한 명을 대통령이 지정한다. 연두교서나 대통령 취임식 등 주요 행사 때만 적용한다.

지정된 사람에게는 대통령급 경호가 따라붙는다. ‘풋볼(football)’로 불리는 핵 코드 가방을 든 참모도 동행한다. 군 통수권 등 국가적 리더십에 잠시라도 공백이 생겨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지난해 트럼프의 상·하원 합동연설 때 지정 생존자는 데이비드 셜킨 보훈장관이었다.

‘생존자’를 지정하는 실무는 대통령 수석보좌관이 맡는다. 대상자가 누구인지는 행사 직전까지 비밀에 부친다. 이 제도는 냉전시대에 도입했다. 2001년 ‘9·11 테러’ 전에는 지정 생존자가 느긋한 시간을 보냈다. 딸과 함께 지내거나 피자 파티를 하기도 했다. 이후로는 몇 시간씩 브리핑을 받고, 재난 대비 매뉴얼도 다 익힌다.

각료라도 누구나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반드시 미국 출생자여야 한다. 국무장관을 지낸 매들린 올브라이트는 1999년 연두교서 발표 때 체코슬로바키아 태생이라는 이유로 대상에서 제외됐다. 국내 사정에 밝아야 하므로 미국 거주 14년 이상 조건을 갖춰야 한다. 나이도 대통령 출마 기준인 35세 이상이어야 한다.

이 제도는 정부 개입이 아니라 의회의 자발적인 발의로 도입됐다. 250년에 가까운 미국식 의회 민주주의의 결실 중 하나다. 2010년 폴란드가 대통령을 포함한 주요 인사들을 항공기 사고로 한꺼번에 잃고 우왕좌왕한 사례 등과 비교된다.

최악의 사태에 대비하는 것은 국가 차원만의 일이 아니다. 글로벌 기업들도 해외 출장 때 ‘같은 비행기를 타지 마라’는 지침을 마련해 놓고 있다. 만에 하나 사고를 당했을 때에 대비한 위기관리 매뉴얼이다. 이병철 삼성 창업자가 일본에서 반도체 기술을 익혀 돌아오던 기술자들에게 각기 다른 항공편을 이용하라고 권한 일화도 유명하다.

재테크 격언 중 ‘계란을 한 바구니에 담지 말라’는 구절도 이런 ‘지정 생존자’ 원리와 같다. 다만 용어 번역에서는 아쉬움이 크다. 우리말로 옮길 땐 ‘지정 생존자’가 아니라 ‘지정된 생존자’라고 하는 게 옳다. ‘지정 승계자’나 ‘지명 승계자’라는 표현도 고려해 볼 만하다.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