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고려 건국 1100주년

입력 2017-12-11 18:05
오형규 논설위원 ohk@hankyung.com


2018년은 고려가 건국(918)한 지 1100년 되는 해다. 건국 1000년인 1918년은 망국의 식민지 시절이라 변변한 행사나 기록도 없이 지나갔다. 내년엔 다양한 기념식과 출판·문화·학술행사들이 준비되고 있어 반갑다.

고려는 475년간 존속했음에도 한국사에선 삼국·통일신라와 조선 사이에서 ‘낀 역사’ 취급을 받아온 게 사실이다. 사대(事大)가 깊은 조선의 ‘색안경’으로 고려사를 접했기에 더 그랬을 것이다. 잦은 전란과 무신정변, 민란이 속출했던 ‘고난의 시기’라는 선입견도 있다. 그러나 고려는 동북아시아에서 수동적인 약소국이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외교·군사와 문화·무역 면에서 강국으로 보는 게 맞다.

고려보다 2년 앞서 등장한 숙적 거란(遼)을 비롯해 여진(金), 몽골 등의 숱한 침입을 견뎌냈다. 거란의 1차 침입 때(993) 담판으로 강동6주를 얻어낸 서희는 역사상 최고의 외교관으로 꼽힌다. 대륙 정세 변화를 주시하며 등거리 실리외교를 폈다. 당쟁과 명분 싸움 끝에 초토화된 조선과 비교된다. 고려의 외교력은 물론 강감찬, 윤관 등 명장과 군사력이 뒷받침됐기에 가능했다.

문화도 활짝 꽃 피웠다.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 상감청자, 팔만대장경 등은 세계 자랑거리인데 국내보다 해외에서 더 높이 평가받는 게 안타깝다. 수도 개경(개성)의 외항인 벽란도에는 멀리 아라비아, 페르시아, 로마 상인들까지 드나들 만큼 국제화됐다. ‘코리아’라는 국명과 고려 인삼이 널리 알려진 것도 이때다.

고려는 중세 국가의 틀을 세웠다. 성씨를 부여한 본관제가 고려에서 시작됐다. 지방세력을 해체하지 않고 근거지를 본관으로 인정해, 왕권과 지방분권의 균형을 도모한 것이다. 따라서 지방관을 파견하지 않은 지역도 많았다. 음서(蔭敍)를 허용하는 신분제 사회이면서도 과거제를 도입(958)해 인재에 문호를 열었다. 재상을 지낸 이규보도 예비시험(향시)에 세 번이나 떨어졌다고 한다.

고려는 대외적으론 왕국이었지만, 대내적으론 황제의 나라로 여긴 점도 특징이다. 독자 연호를 썼고, 개경을 황도(皇都)로 칭했다. 1960년대 가요 ‘황성(皇城)옛터’는 개성의 옛 고려 궁터(만월대)의 쓸쓸한 감회를 담은 것이다. 서경(평양) 천도를 주장한 묘청은 대외적으로 황제국을 지향하자는 급진파였던 셈이다.

생활상은 고려가요에서 보듯이 자유분방하며, 모계사회여서 시집살이 대신 처가살이가 보편적이었다. 그러나 부곡민에 대한 제약과 차별, 반란과 하극상, 말기 불교의 타락 등 그늘도 많았다. 더구나 고구려를 계승했다면서도 고구려나 발해에 비해 영토가 축소돼 과소평가되는 면도 없지 않다. 건국 1100주년을 맞는 고려의 진면목을 차근차근 조명해볼 필요가 있다.

오형규 논설위원 oh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