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무원법 개정안 논란…소신정책 가능 vs 실무자에 부담만
위법한 명령 거부해도 보호
내부 제보자 불이익 금지
부당한 인사조치도 구제
'알아서 처신하라'는 경고?
실무자에 위법여부 판단 요구
업무처리 위축시킬 수도
[ 고경봉 기자 ] “상급자 지시를 받고 고위 인사에게 특수활동비를 전한 정부 부처 직원은 얼마나 책임져야 하나.” “진보 성향 문화인 명단(문화계 블랙리스트)을 작성한 해당 부처 실무자는 이를 거부할 수 있었을까?”
위법·부당한 상관 지시를 거부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의 국가공무원법 개정안에 대해 일선 공무원들이 갑론을박하고 있다. “소신을 가지고 업무에 전념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됐다”는 호평도 있지만 “불법 여부를 판단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알아서 처신하라’는 말 아니냐”는 볼멘소리도 나오고 있다.
위법한 지시 거부, 불이익 금지
인사혁신처는 위법한 상관 지시나 명령을 거부해도 인사상 불이익을 받지 않도록 하는 내용의 국가공무원법 개정안을 14일 입법예고했다. 개정안의 골자는 공무원들이 상급자의 위법하거나 부당한 지시를 거부할 권리를 갖게 하는 것이다.
이행 거부로 인사 조치를 당한 공무원들은 민간위원이 포함된 고충심사위원회를 통해 구제받을 수 있다. 또 위법·부당한 인사운영 행태를 제보할 경우 불이익을 주지 못하도록 법률적 근거를 마련했다.
불법·부당 지시 관련 제보자의 불이익을 금지하는 규정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의견이 우세하다. 한 공무원은 “내부 고발자가 불이익을 받지 않는다는 인식이 정립되면 상호 감시가 활발해지고 인사채용 비리나 업체 부당 지원, 불법 인허가 등 명백한 부정행위를 사전에 막는 역할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불법적인 상관의 지시를 거부할 수 있는 권리에 대해서는 평가가 엇갈린다. 긍정적인 부분은 소신 정책이 가능해졌다는 점이다. 인사상 불이익 때문에 위법한 지시인 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따라야 했던 관행을 상당 부분 없앨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크다. 한 일선 공무원은 “위법·부당 여부에 대해 모호한 측면이 있지만 실무자로서는 앞으로 이 정책이 올바른지 한번쯤 더 고민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소신 정책 가능 VS 실무자에겐 부담
우려 섞인 시선도 적지 않다. 또 다른 공무원은 “정권 교체 후 전 정권의 불법·부당행위 여부에 대한 판단이 이뤄지는 경우가 비일비재한데 실무자에게 위법행위를 스스로 판단하라고 하는 게 맞는지 모르겠다”고 토로했다. 일선 공무원들이 느끼는 부담도 커졌다. 불법적이거나 부당한 정책에 대한 거부권을 갖는다는 건 나중에 그 결과에 대해 자신이 책임져야 할지 모른다는 의미도 된다.
이번 개정안은 문재인 대통령이 “영혼을 가져야 한다”며 일선 공무원을 질타한 데 따른 후속조치다. 문 대통령은 지난 8월22일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업무보고에서 “공직자는 국민을 위한 봉사자이지 정권에 충성하는 사람이 아니다”며 “정권 뜻에 맞추는 영혼 없는 공직자가 돼서는 안 될 것”이라고 말했다.
중앙부처의 한 과장급 간부는 “박근혜 정부 국정농단에 대해 여러 공직자들이 죄의식 없이 협조했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라며 “이 개정안은 앞으로 일선 실무자들도 불법 가능성을 인지한 상황에서 묵시적으로 업무를 처리하면 안 된다는 점을 명시한 것”이라고 말했다.
국회 예산정책처 사업평가국장으로 공직을 경험한 김태윤 한양대 행정학과 교수는 “전 정부 당시 문화체육관광부 실무자들이 진보 성향 문화계 인사들의 리스트를 파악해 취합하는 단순 작업을 하면서 정권의 전반적인 의도를 파악했을 가능성은 낮다”며 “일선 공무원이 정책적 판단을 하기 쉽지 않은 상황에서는 취지와 달리 업무를 위축시킬 여지가 있다”고 말했다.
고경봉 기자 kgb@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