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미제(美製)'의 추억

입력 2017-07-19 18:33
아이들에게 둘러싸인 미군이 초콜릿이나 껌을 나눠주는, 빛 바랜 흑백 사진을 누구나 한번쯤 봤을 것이다. 해방과 6·25를 지나 한국 곳곳에는 미군 기지가 생겨났다. 아이들은 미군만 보면 “기브 미 초콜릿”을 외쳤다. 가난과 굶주림에서 못 벗어났던 아이들에게 초콜릿은 둘이 먹다 하나가 죽어도 모를 정도로 맛난 간식이었다. 단 것이 귀했던 만큼 추잉 껌 역시 꿀맛 같았을 것이다.

한국의 전후 복구를 위해 미국은 막대한 원조를 쏟아부었다. 밀가루 옥수수가루 설탕 등 기초 식량과 옷가지 등이 흘러들어 왔다. 미국에서 왔거나 미군이 건네준 것은 ‘미제’였고 그것은 맛있는 것, 귀한 것, 혹은 고급스러운 것의 대명사가 됐다. 미군기지 인근에는 부대에서 흘러나오는 각종 미제, 이른바 ‘양키 물건’을 파는 ‘양키 시장’이 하나둘 들어서기 시작했다. 간스메(통조림) 스팸, 치즈, 과자, 동동구리무, 양담배, 양주, 구제 청바지, 지포 라이터 등 없는 게 없을 정도였다. 미제 상품을 보따리에 담아 파는 ‘양키 물건 장수’도 있었고 서울의 남대문시장에도 양키 물건 코너인 ‘도깨비시장’이 생겨났다.

이후 소득이 늘면서 미국 공산품도 공식 절차를 통해 수입되기 시작했다. 제너럴일렉트릭의 선풍기나 다리미, 웨스팅하우스의 냉장고 등이 그런 것들로 부잣집에서나 볼 수 있었던 고급 가전제품이었다. 조악했던 당시 국산품과는 품질, 디자인 등에서 비교가 되지 않았다. “미제는 ×도 좋다”는 얘기가 나오던 시절이었다.

그랬던 미제가 언제부턴가 ‘그저그런’ 제품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지난 수십 년간 독일과 일본의 기술에 밀리더니 최근엔 ‘메이드 인 차이나’의 가격에 치이고 있다. 요즘엔 “내 옷이 미제”라고 밝혀봤자 관심 갖는 사람도 거의 없다. 가전제품 중 미제를 찾아보기도 거의 불가능해졌다. 국내 수입차 시장에서 미국차는 유럽이나 일본차와는 경쟁 상대도 못 될 정도다.

그런 미국이 부활을 꿈꾸고 있다. ‘아메리카 퍼스트’를 외쳐온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 기업의 ‘유턴’을 독려하는 한편 국산품 애용도 권장하고 있다. 최근 입소스 조사에 따르면 미국인의 70%는 미국산 제품 구매가 ‘매우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수입품보다 10% 이상 비싸도 사겠다는 응답은 21%에 불과했다. 애국심에 호소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는 얘기다.

미국이 과거의 영광을 되찾을 수 있을까. 한편에선 과거의 잣대만으로 미국을 평가해선 곤란하다는 견해도 있다. 미국엔 구글과 페이스북, 아마존이 있고 아이폰도 있다. 이젠 석유마저 넘쳐난다. ‘미제의 추억’은 과거가 됐지만 지금 미국은 과거와는 다른 새로운 ‘미제’로 세계를 장악해 나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김선태 논설위원 ks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