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자처 못 찾는 글로벌 기업들…'현금 곳간'에 12조달러 쌓여있다

입력 2017-07-02 20:28
현금자산 10년새 80% 급증…수천년 채굴한 금 가치보다 많아
설비투자 부담 적은 IT기업들, 자사주 매입 등 주주 위해 써
기업 자금 끌어들이려 국가간 '법인세율 경쟁'도


[ 도쿄=김동욱 기자 ]
애플 도요타자동차 마이크로소프트 소니 텐센트 등 글로벌 주요 기업이 천문학적 규모의 현금을 쌓고 있다. 세계 경기가 회복세를 보이고 있지만 과거 정보기술(IT) 붐 때와 같은 고성장 투자처를 찾지 못하고 있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특히 매출과 영업이익, 시가총액 등에서 세계 최상위권을 차지하고 있는 IT기업들은 자동차 철강 등 제조업체와 달리 대형 설비 투자가 필요 없어 ‘돈 쓸 곳’을 찾기 힘들다는 지적이다.

◆기업들 너도나도 ‘돈 쌓기’

니혼게이자이신문은 2일 “글로벌 주요 상장사가 보유한 현금과 예금, 보유채권, 차입금 등 현금성 자산 규모가 총 12조달러(약 1경3740조원)에 달한다”며 “기업이 투자 대신 현금을 보유하는 건 세계적 현상”이라고 보도했다. 이런 현금성 자산은 10년 전에 비해 80% 가까이 늘어난 것이다. 인류가 유사 이래 채굴한 전체 금(약 7조5000억달러)을 모두 사고도 남는 규모다.

현금성 자산이 빚보다 많은 ‘실질 무차입’ 기업도 전체 글로벌 상장사의 53%나 됐다. 반면 상장사들의 차입은 지난 10년간 7% 증가한 19조달러에 그치는 등 큰 변화가 없었다.

기업별로는 애플이 2568억달러를 보유해 가장 많았고, 도요타자동차(1474억달러), 마이크로소프트(1333억달러), 소니(1087억달러) 등이 뒤를 이었다. 미국과 일본 기업뿐 아니라 중국 차이나모바일(843억달러)과 텐센트(477억달러), 한국 삼성전자(769억달러) 등도 돈 쓸 곳을 찾지 못하고 있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과거엔 돈을 쌓아두고 관망하는 보수적 경영이 일본 기업의 전매특허였지만 최근 들어선 세계 기업의 ‘일본화’가 진행되고 있다”고 평했다.

지난 10년간 현금성 자산이 가장 많이 늘어난 기업도 애플(2414억달러 증가)이었다. 마이크로소프트(998억달러) 알파벳(구글 지주사·832억달러) 등이 뒤를 이었다. 지역별로는 미국 기업이 2조8000억달러를 쌓아두고 있었고, 유럽(2조1000억달러) 일본(1조9000억달러) 중국(1조7000억달러) 등이 뒤를 따랐다.

◆돈 쓸 곳 찾기 힘든 IT

기업들이 현금성 자산을 비축하는 이유는 유망한 투자처를 찾을 수 없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많다. 과거엔 글로벌 금융위기 등 힘들 때도 IT산업을 중심으로 혁신을 지렛대 삼아 급성장하는 기업이 있었지만 최근 성장세가 두드러지는 분야가 눈에 띄지 않는다.

글로벌 기업 생태계의 최상위권에 IT 기업이 대거 포진한 것도 현금 축적을 부추기는 측면이 있다. IT 기업들은 제조업체와 달리 대형 설비 투자가 필요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 이들은 주로 연구개발이나 인수합병(M&A), 자사주 매입 등에 돈을 쓴다. 애플은 인공지능(AI) 관련 기업 인수 등으로 50여 개 회사를 사들였음에도 보유 현금 자산 규모가 아이폰을 처음 출시한 10년 전에 비해 17배로 늘었다.

이러다 보니 투자보다 주주를 위해 막대한 돈을 쓰는 경우가 늘고 있다. 애플은 2012년 이후 2000억달러 이상을 주주환원에 썼다. 팀 쿡 애플 최고경영자(CEO)는 지난 5월3일 “(2012년 시작된) 자사주 매입 규모를 지난해 1750억달러에서 올해 2100억달러로 늘리겠다”고 공언했다. 스위스 네슬레는 지난주 보유자금 245억스위스프랑(약 29조2500억원)의 80% 가까운 200억스위스프랑을 2020년까지 자사주 매입에 사용하겠다고 발표했다. 일본에서는 자사주 매입 증가로 스스로 최대 주주가 된 기업이 전체 상장사의 10%에 달한다.

이들 기업의 상당수는 법인세율이 낮은 아일랜드, 네덜란드 등에 본사를 두거나 이익을 남겨두는 방식으로 세금을 피한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일시적 감세를 통해 자국 기업의 자금을 미국으로 되돌리려 하는 등 각국은 기업들이 현금을 들여와 쓸 수 있게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도쿄=김동욱 특파원 kimd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