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원순 논설위원 huhws@hankyung.com
지난 4월 총선 직후 국제 신용평가사들의 경고가 무섭게 맞아떨어졌다. 여소야대가 확정되자 무디스는 국가신용에 부정적 영향을 줄 것이라는 발표문을 냈다. ‘한국 국회는 종종 교착상태에 빠졌다’며 노동개혁 등이 지연될 것이라는 경고였다. 그때 피치도 ‘핵심 구조개혁이 어려워졌다’며 정치리스크를 제기했다. 밖에서 더 정확했다.
근 열흘간 국회의 극한 투쟁은 그 예측 그대로였다. 당사자들은 그 투쟁이야말로 열심히 하려다 보니, 아니 실제로 열심히 한 것이라고 항변할지 모르겠지만 정기국회 파행은 명백히 파업이었다. 어제부터 국정감사를 재개한다지만 그들의 ‘정상화’란 것에 큰 기대도 걸기 어려울뿐더러 그런 합의를 곧이 믿다가는 바보가 된다. 입법부 수장이 형사고발당하고, 여당 대표는 초유의 단식 농성을 벌였다. 정치가 투쟁, 농성을 쉽게도 한다?
무섭게 적중한 무디스·피치 경고
한국적 노동 전통이 국회에서도 일상화되면서 정치가 노동투쟁판같이 된 것이다. 문제가 다분한 장관해임안이었고, 안건 상정 과정도 충분히 논란이 될 만했다. 그래도 ㈃?대표가 목숨까지 내건 결단이었다면 지금쯤 뭔가 결과가 있어야 하지 않나. 정치의 9할이 말이라 했는데, 여야 공히 허언(虛言)의 정치에 매달린다. 열흘의 헛싸움보다 이제부터 어떤 법을 마구 찍어낼지가 더 무섭다.
이런 판에도 정치를, 국회를 신뢰할 수 있을까. 국회가 조롱거리가 안 되고, 정치가 희화화되지 않는다면 그게 이상해진다. 정치가 붉은 띠 맨 노동운동처럼 된 결과다. 대국민 사죄를 해야 하는 의장이, 공당 대표가 리더십 라인에 당당히 설 수 있을까.
대조적으로 노조의 정치 행보는 더욱 넓어진다. 262개 공공기관 중 마지막 남은 5개 서울시 산하 공기업이 성과연봉제 도입을 저지한 것도 그렇다. 서울 지하철노조는 서울시장과 손잡고 정부의 개혁을 막아섰다. 현대자동차 노조 투쟁도 지금은 임금 이슈지만, 상급의 민노총은 툭하면 정치구호다.
'무개념 국회' '무염치 노조' 질주
최근 은행 파업 때 모 은행 노조위원장이 은행장 방을 걷어차고 들어갔다는 소문은 정치하는 노조를 잘 보여줬다. 파업 시 점포별로 ‘적정’ 근무인원까지 노조위원장과 행장이 협의했다는 것부터가 정치였다. 당국과 여론의 압박에 행장이 근무자를 늘리자 노조위원장이 행장실로 달려간 것이다. ‘낙하산 시비’ ‘관치 논란’까지 적당히 해주며 노조가 행장 선임에 끼어들었다는 대목도 구태 정치다. 노사 간의 내밀한 합의보다 파업참가율이 낮아지는 바람에 금융노련 선거에 불리해진 위원장이 길길이 뛴 것이라는 대목 또한 여의도 뺨치는 저급의 정치다. 지부조합장과 산별위원장을 거친 뒤 정치권 드나들면 결국 ‘똥배지’ 노린다는 것도 이젠 낯설지 않다. 국회가 선동하고 투쟁하는 사이 노조는 전문 정치그룹이 됐다. 산별위원장 행차에 노조간부들이 길게 도열하는 과거 남미 풍경과 겹쳐진다.
정치노조가 성과연봉제를 막으니 6년 넘은 정부의 공기업개혁도 매듭이 안 된다. 정책을 좌우할 정도로 노조는 이미 강력한 정치세력이다. 현대차 노조는 파업으로 수출을 1조원 날리고, 국가의 생산지표까지 마이너스로 만들 만큼 경제도 뒤흔든다. 생산의 위축세는 다음달에 더 악화된다는 우울한 전망이 나온다. 국회와 노조라는 양대 파워집단이 한국을 가라앉히려 한다. 본업에서 일탈한 결과다. 무개념 정치, 무염치 노조다.
허원순 논설위원 huhw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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