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재윤의 '중국과 中國' (1)] 중국을 읽는 8가지 키워드

입력 2016-08-22 19:00
수정 2016-10-19 15:07
필자가 정한 제목의 ‘중국’은 우리가 알고 있는 중국, 즉 우리가 중국이라고 이해하고 있는 현상의 일부다. ‘中國’은 실존적인 실체다. 현상과 실체에는 당연히 거리가 있다. 우리가 중국을 잘 알고 있다고 착각하고, 내 식으로 판단하는 오만과 이 오만을 바탕으로 한 판단으로 말미암아, 중국에서 늘 같은 실패를 거듭한다.

중국인의 사유방식을 잘 알아야 한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격언을 기억하자. 중국을 잘 안다고 여기는 사람도, 겸손하게 늘 이면을 들여다봐야 한다. “習而不察, 察而不覺”(습이불찰, 찰이불각: 이미 습관이 돼 발견하지 못하고 발견을 해도 느끼지를 못한다)이라는 말이 있다. 중요한 것은 기시감이 아니라 미시감이다.

중국이라는 거대한 코끼리를 어떻게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까? 담론의 차원에서 8가지 키워드를 가지고 코끼리 다리 만지기를 시도해 보려고 한다. 여러 부위를 만져보고, 경험과 토론 및 독서를 바탕으로 한 논리 등을 근거로 해서, 추론과 정리를 함께 해나간다면 그래도 많이 접근할 수 있지 않을까?

관시는 현실사회의 행위규범

필자가 중국을 보는 8가지 키워드는 文(문자),義(의리),面(체면),朋(친구·관시), 忠(충성),信(정보),政(파벌주의),同(현지화)이다. 먼저 文(문)은 문자다. 중국을 하나의 중국으로 묶고 있는 것은, 오직 ‘한자’라고 볼 수 있다. 한자는 표의문자로서 글자 수가 많기 때문에 알기도 힘들뿐더러, 우리와 중국의 같은 한자가 때론 다른 의미를 나타내기도 한다. 더구나 중국인의 함축적인 표현방식은 이방인들을 더욱 헷갈리게 한다. 義(의)는 의리다. 중국인들은 “의리를 지켜야 함께할 수 있다”고 흔히 얘기한다. 의리는 무협지에서나 나오는 개념이 아니라, 중국인들의 현실사회 행위규범이다.

막연할 수도 있는 이 개념이 왜 중국인들 사이에서 구체적인 행위규범이 됐는지를 소개할 것이다. 그래야 ‘관시(關係)’를 맺어가는 최소한의 ‘이상적인 기준’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面(면)은 체면이다. 중국인의 ‘체면 관리’를 단순히 허례허식이나 형식주의라고만 이해하면 절대 안 된다. 중국인조차 ‘체면 관리’에 부정적이기도 하지만, 학자들은 중국인의 ‘생명줄’이라고까지 말하기도 한다. 중국인의 사유 바탕에는 ‘체면’에 대해 복잡하고 확고한 뿌리가 있다.

임어당(林語堂)은 “중국을 통치하는 3개의 여신이 있다”며, ‘체면’, ‘운명 또는 인연’ 그리고 ‘보은’을 들었다. 체면이 으뜸이고, 체면의 이면에는 중국인들이 꿈꾸는 군자(君子)의 모습이 투영돼 있다.

朋(붕)은 친구다. 중국의 관시를, 우리는 때론 부정적인 면 혹은 재미있는 얘깃거리로만 이해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인정사회’(人情社)는 원래 우리 사회의 특징이기도 했다. 중국문화 속에서의 규범, 윤리와 합리에 대한 기준과 해석이, 우리나라가 따르고 있는 서양의 글로벌과 다를 수 있다. 체면과 인정을 중시하는 중국의 관시를, 중국인의 시각에서 진지하게 살펴봐야만 한다.

중국에서의 忠(충)은 우리의 개념과 사뭇 다르다. 중국은 개인에 대한 충성이 강조되지만 우리는 개인보다는 조직에 대한 충성을 요구한다. 충성을 바탕으로 한 조직 설계가 중국에서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근본 이유다.

중국에서 충성은 개인적 의미

信(신)은 믿음이 아니라 정보를 의미한다. 중국에서 늘 똑 같은 실수와 실패를 반복하는 우리나라 회사가 정말 많다. 원인을 파악하지 못해서이기도 하고, 우리가 이미 파악했다고 여기는 것조차 오류가 많다. 정보가 제대로 흐르지 못할 뿐 아니라, 왜곡된 정보가 입력되고 잘못 축적되기 때문이다.

政(정)은 파벌주의를 말한다. 중국 사회의 내부 파벌주의는 우리나라보다 훨씬 보편적이다. 알고 대처하면 큰 문제가 되지 않지만, 만약 우리와 별반 차이가 없겠지라는 안이한 생각을 한다면 정말 큰 위험이 될 수 있다.

同(동)은 현지화로서, 앞서 키워드로 설명한 것 외에, 협상이나 조직관리 등의 차원에서 현지화에 대한 소견을 소개해 보려고 한다. 현지화는 목적이 아니라, 수단 내지는 방법임을 직시해야만 한다.

이 연재를 통해 ‘중국’이 아닌, ‘中國’을 함께 공부하고 싶다. 抛引玉(포전인옥: 벽돌을 던져 구슬을 끌어들이다. 부족한 의견을 먼저 소개함으로써 摸?사람의 고견을 끌어낸다는 의미)의 뜨거운 마음으로 시작하려고 한다.

한국콜마 고문


[한경닷컴 바로가기] [스내커] [한경+ 구독신청]
ⓒ 한국경제 & hankyung.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