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감원, 추심 피해 늘자 행정지도 방침
금융사 "채무자 도덕적 해이 늘 것" 우려
[ 김일규 기자 ]
채소가게를 운영하던 A씨(40)는 2003년 은행에서 1000만원을 대출받았다가 장사가 안 돼 2006년부터 한푼도 갚지 못했다. 은행은 2011년 돈을 받을 길이 없다고 판단해 A씨의 대출채권을 C대부업체에 팔았다. 대부업체는 이후 A씨에게 ‘1만원만 갚으면 연체이자를 면제해주고 원금도 깎아주겠다’고 제안했다. A씨는 1만원을 송금했고 대출금의 절반인 500만원을 갚겠다는 각서까지 썼다.
그러자 A씨는 갚지 않아도 될 빚을 다시 상환해야 할 처지가 됐다. 금융채무는 일반적으로 연체 5년이 지나면 시효가 소멸해 갚지 않아도 되지만, 조금이라도 갚으면 변제 의무가 다시 살아나기 때문이다.
앞으로는 이런 ‘소멸시효 완성채권’(이하 소멸채권)을 은행 등 금융회사가 대부업체에 파는 행위가 제한된다. 채무자들이 소멸채권에 대해 잘 모른다는 점을 이용해 대부업체가 채무자에게서 돈을 받아내는 걸 막기 위해서다.
○금융社 소멸채권 매각 제한
금융감독원은 올 하반기 금융사들이 시효가 소멸한 채권을 대부업체에 매각하거나 추심하는 행위를 자제하라는 내용의 행정지도를 할 계획이라고 9일 발표했다.
통상 금융채무는 연체한 지 5년이 지나면 시효가 소멸한다. 갚을 의무가 사라진다는 얘기다. 그러나 금융사가 법원에 지급명령을 신청해 받아들여지거나 채무자가 조금이라도 빚을 갚으면 별도 법적 절차 없이 소멸시효가 부활한다.
금감원은 대부업체들이 이 점을 노려 은행 카드사 저축은행 상호금융회사 등에서 소멸채권을 사들이고 있다고 설명했다. 소멸채권을 산 뒤 법원에 지급명령을 신청하거나 ‘1만원만 갚으면 원금의 50%를 감면해 주겠다’는 식으로 채무자를 회유해 시효를 부활시키고 있다는 얘기다.
지난 3월 말 기준 전체 금융사가 보유한 소멸채권(개인 기준)은 3조1000억원, 채무자는 170만명 수준이다. 2010년부터 5년간 대부업체들이 162개 금융사에서 사들인 소멸채권은 4122억원(원금 기준)에 달한다. 매입 가격은 120억원으로 원금의 2.9% 수준이다. 이상구 금감원 부원장보는 “대부업체가 금융사에서 소멸채권을 원금의 1~2%에 산 뒤 채무자에게 원금을 전부 다 받아낸다”고 말했다.
금감원은 또 1000만원 이하(원금 기준) 소액 채권에 대해선 시효가 소멸하면 추심을 제한하는 내용을 법률에 반영하는 방안을 추진하기로 했다.
금감원 관계자는 “법원이 지급명령을 하더라도 채무자가 2주 내에 이의신청을 하면 소멸채권 시효가 부활하지 않는다”며 “대부업체가 원금을 깎아주겠다며 일부 상환을 요구하는 경우 소멸한 채권을 부활시키려는 숨은 의도가 있으므로 갚지 말아야 한다”고 설명했다.
○모럴해저드 조장 우려도
금감원의 이 같은 방침에 금융권 일각에선 채무자의 도덕적 해이를 부추길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소멸채권은 채무자가 갚아야 할 빚을 갚지 않아서 발생한 것인데, 해당 채무자에게 소멸채권이 되살아나지 않게 하는 방법을 감독당국이 안내하는 건 과잉보호라는 지적이 나온다.
금융사 관계자는 “연체자가 금융사의 추심으로 고통을 겪을 수 있지만, 돈을 빌린 뒤 5년만 지나면 안 갚아도 된다는 걸 알리겠다는 것은 채권자와 채무자 간 신뢰를 무너뜨릴 수 있다”고 말했다.
금융사의 합법적 이익 창출 기회를 감독당국이 제한하는 것 자체가 문제라는 지적도 있다. 금융사들이 소멸채권을 사고파는 행위가 법적으로 문제될 게 없는데, 이를 제한하는 건 과도한 시장개입 아니냐는 불만이다.
■소멸시효 완성채권
금융채무의 시효는 일반적으로 채무자가 대출원리금을 연체한 날부터 5년이 지나면 소멸한다. 시효가 소멸한 채권에 대해선 채무자의 변제 의무가 사라지지만 이후 소액이라도 다시 갚으면 시효가 부활할 수 있다.
김일규 기자 black0419@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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