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수첩] '호황 기사' 꺼리는 화장품 중기

입력 2015-05-11 20:43
민지혜 증권부 기자 spop@hankyung.com


“아이고, 이익 규모는 말 못해요. 여기저기서 달려들 게 뻔한 걸요.”

‘K뷰티 낙수효과’를 취재하기 위해 찾아간 한 화장품 원료업체의 사장은 이렇게 손사래부터 쳤다. 대기업들의 주문이 쏟아지면서 올해 사상 최대 실적을 낼 것으로 예상하고 있지만 수치를 알려줄 수는 없다고 했다. “회사가 잘나간다는 기사가 실명으로 나가면 국세청 세무조사를 받거나 십중팔구 사이비 언론들의 표적이 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나마 이 회사는 점잖은(?) 축에 속했다. 어렵사리 연락처를 알아내 전화를 건 중소기업들 중엔 “신문사요? 우린 기사 나가는 거 싫습니다”며 딱 잘라 취재를 거절하거나 “회사 전화번호를 어떻게 알았느냐”, “도대체 매출실적을 알려달라는 이유가 뭐냐”고 시종 ‘까칠’하게 나오는 곳들이 많았다.

어이가 없었던 것은 “얼마짜리 기사냐”(모 중소업체 사장)고 물어오는 질문이었다. 기자가 “한국 화장품의 글로벌 약진으로 중소기업들의 일감이 크게 늘고 있다는 방향의 기획기사를 준비하고 있다”며 취재 의도를 설명해도 “그동안 한두 번 속았는지 아느냐”고 역정을 냈다. 어쩔 수 없다 싶어 전화를 끊으려는 기자에게 그의 푸념이 길게 이어졌다. “처음엔 다들 그렇게 말씀하시죠. 그래서 취재에 응하면 나중에 기사값이 얼마라는 둥, 광고를 안 하면 재미없다는 둥 뒤통수를 치더군요….”

그동안 중소기업들이 ‘사이비 언론’에 얼마나 시달렸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수십년간 간난신고를 견디며 묵묵히 제조현장을 지켜온 기업들이 오랜만에 찾아온 ‘호황’을 제대로 알리지도 못하는 언론 환경이 못내 씁쓸했다. 악의적인 기사를 싣겠다고 협박해 돈을 뜯는 ‘짝퉁·사이비 언론’이 기업경영에 큰 부담을 준다는 조사 결과도 많다.

노파심에서 국세청에도 한마디 당부하고 싶다. 정기 조사라면 몰라도 당분간 중소 화장품업체에 대한 ‘특별 조사’는 자제했으면 한다. 모처럼 돈을 벌어 공장을 늘리고 사람도 새로 뽑는다는데, 세무조사반부터 들이닥쳐서야 되겠나. 기업이 성장할 수 있을 때 충분히 성장하는 것은 향후 국세청 세수 실적에도 이로운 일이다.

민지혜 증권부 기자 spop@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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