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포비아'에 갇힌 공무원] 인허가 특혜시비 땐 정책감사…"재량권 내세워 질질 끄는 게 낫다"

입력 2014-12-07 20:35
수정 2014-12-08 03:43
기업 애먹이는 소극적 행정처리

민원 무서워 공장 증설·호텔 신축 불허
"일단 감사 들어오면 한직으로 밀려나
수년치 자료 내야하고 금융계좌까지 조사"


[ 강경민 / 김진수 / 김주완 기자 ]
전북 임실군에 있는 한 냉동만두 제조업체는 최근 주문량이 폭주하면서 인근 부지에 생산 공장을 증설할 계획을 세웠다. 공장 신설 시 160명의 신규 고용 창출과 지역 경제 활성화가 예상된다. 공장을 신설하려면 현 농림지역인 부지 용도를 계획관리지역으로 전환해야 한다. 그러나 임실군은 타당성 용역조사가 필요하다는 이유로 2016년께 결정을 내리겠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이 업체는 “기업은 1분1초가 아까운 상황인데도 공무원들은 감사를 의식해 결정을 한가롭게 미루고 있다”고 지적했다.

정부는 올 들어 경제 활성화를 가로막는 지방자치단체의 조례 및 규칙 등 각종 규제 철폐에 앞장서고 있다. 그러나 이런 규제와는 달리 눈에 보이지 않는 공무원의 소극적인 행정 처리를 뜻하는 행태규제야말로 기업 투자를 가로막는 근본적인 규제라는 지적이 나온다.


○알맹이 빠진 규제개혁

최근 지방규제 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전체 응답 기업의 30.6%가 공무원의 행태규제로 인해 피해를 보고 있다고 답했다. 행정자치부는 “행태규제는 제보가 없으면 규제 여부조차 파악하기 어려워 추정이 불가능하다”고 지적했다.

법적 요건을 갖췄음에도 인허가를 반려하거나 불허가 처분을 내리는 게 대표적이다. 관련법상 반려 처분을 내리는 근거가 없기 때문에 공무원들은 유권해석 및 재량권이라는 이유를 내세운다.

경기 화성에 있는 S기업은 10년 전부터 단지 내 도로 건설 규제 탓에 제때 공장을 짓지 못해 어려움을 겪었다. 현행 지침에 따르면 일반산업단지는 전체 면적 중 8% 이상의 도로 확보가 필요하다. 하지만 S기업은 단지를 단독으로 사용하고, 단지 내엔 지역 간 연결도로도 없다. S기업은 의무도로 면적비율을 낮춰달라고 요청했지만 해당 지자체는 특정 기업에 특혜를 줬다고 감사받을 것을 우려해 거부했다. 이 때문에 도로계획 변경사항이 발생할 때마다 6개월 이상의 인허가 기간이 소요돼 공장 건설에만 수년이 걸렸다. 이 규제는 지난달 정부 규제개혁개선위원회에서 의무도로면적 비율을 4%로 낮추기로 하면서 간신히 해결됐다.

지역 민원을 의식해 법률상 근거 없는 서류를 제출하도록 강요하는 경우도 많다. 경남 김해시는 지난해 한 업체가 신청한 공장 설립 요청에 대해 법률상 근거 없는 진입로 소유자 동의서, 가처분권자 동의서 등을 제출하도록 통보 후 이를 이행하지 않자 반려 처분했다.

○“감사받느니 복지부동이 낫다”

한 중견 개발업체 대표는 “법령에서 ‘해당 지자체가 판단해서 할 수 있다’는 내용이 나오면 십중팔구 처리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대부분 공무원도 이 같은 사실을 인정한다. 서울 A구청 관계자는 “지자체가 판단해서 허가를 내줄 수 있는 사안이라 할지라도 보수적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다”고 털어놨다.

공무원들은 행태규제의 가장 큰 이유로 감사원의 ‘정책감사’를 꼽는다. 각 지자체 산하 감사관들도 공무원들이 두려워하기는 마찬가지다. 감사의 시작은 대부분 제보에 따른 민원에서 비롯된다. B구청 관계자는 “인허가를 내줄 때는 찬반 민원이 엇갈리는 경우가 많다”며 “반대 민원인들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감사 제보로 이어진다”고 지적했다. 행자부 관계자는 “행태규제의 90% 이상은 인허가 업무가 많은 지자체 도시계획 및 건축 분야에서 발생한다”고 말했다. C구청 관계자는 “적극적으로 일처리를 했다가 일단 감사가 들어오면 잘못이 없더라도 한직으로 밀려나는 경우를 수없이 봤다”며 “인허가를 질질 끌거나 아예 안 내주는 게 차라리 낫다”고 털어놨다.

서울시 한 간부는 적극적인 유권해석을 통해 건물 인허가 관련 허가를 내줬다가 감사받은 경험을 털어놨다. 그는 “감사원에서 수년치 자료와 보고서를 모두 공개하라고 했을 뿐 아니라 개인 금융계좌까지 조사했다”며 “그 사건 이후 법에 명시돼 있지 않은 인허가는 절대로 내주지 않는다”고 말했다.

김문겸 숭실대 교수는 “규제개혁 필요성은 줄곧 제기됐지만 지금까지 바뀐 건 거의 없다”며 “공무원들의 소극적인 행정 처리를 개선할 수 있는 제도 개선이 없는 한 규제개혁은 불가능하다”고 지적했다.

■ 행태규제

관련법 및 조례, 규칙상 저촉되는 사항이 없는데도 공무원의 재량권으로 인허가를 내주지 않는 규제. 공무원들의 소극적인 행정 처리로 인한 그림자 규제를 뜻한다.

강경민/김진수/김주완 기자 kkm1026@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