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 신작 장편소설 펴낸 소설가 복거일 씨 "암 환자 이전에 나는 작가…항암치료 대신 글쓰기 선택"

입력 2014-03-27 21:22
수정 2014-03-28 04:30
한가로운 걱정들을 직업적으로 하는 사내의 하루 / 복거일 지음 / 문학동네 / 200쪽 / 1만1500원


[ 박상익 기자 ]
소설가 복거일 씨(사진)가 자전적 소설 《한가로운 걱정들을 직업적으로 하는 사내의 하루》를 냈다. 1988년에 낸 1부 《높은 땅 낮은 이야기》에서 자신의 군 생활 경험을 다뤘던 복씨는 2006년 사회에 참여하는 지식인의 비판적 고뇌를 담은 《보이지 않는 손》을 2부 격으로 낸 데 이어 3부인 이번 작품에서도 소설가이자 사회 참여 지식인으로 살아온 자신의 모습을 그렸다.

자전적 소설이라지만 주인공의 암 발병은 소설적 구성이려니 했다. 그러나 지난 26일 만난 복씨는 “간암 진단을 받은 지 2년6개월 됐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담담히 말했다. 이 소설은 그가 암 진단 후 겪은 어떤 하루의 담백한 일기다. 주인공 현이립은 간암 진단을 받은 뒤 가족에게 “치료받기엔 좀 늦은 것 같다. 남은 날이 얼마나 될진 모르지만, 글 쓰는 데 쓸란다. 한번 입원하면 다시 책을 쓰긴 어려울 거다”고 말한다.

“이미 암이 상당히 진행됐어요. 어떻게 판단하기 어려운 상황이에요. 치료가 기본이지만 나는 작가니까 글 쓰는 것이 기본이죠. 타임머신을 타고 16세기 조선으로 간 사람의 이야기를 다룬 장편소설 《역사 속의 나그네》를 1991년에 세 권 내고 중간에 멈추니까 독자들의 항의가 심했어요. 항암 치료를 받으면 연명은 할 수 있을지 몰라도 글은 쓸 수 없다 생각해서 치료 대신 글을 썼습니다.”

현이립은 아내가 친정 결혼식으로 지방에 내려가자 홀로 산책길에 나선다. 서울 수색동 자택에서 아내와 함께 가양대교까지 다녀오던 한강변 ‘풀코스’다. 현이립이 길을 걸으며 보고 느낀 것들은 자신이 걸어왔던 인생길과 겹친다.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지만 세상 걱정을 하는 현이립을 보고 어떤 이는 ‘한가로운 걱정을 직업적으로 하는 사내’라 말할지 모르지만 꿋꿋하다. 현이립이란 또 다른 자아를 가진 복거일은 세상 문제를 비판한다. 최근 불고 있는 규제 개혁 바람에 대해서도 목소리를 높인다.

“일반적으로 경제학 교과서는 ‘감독기관이 산업계의 포로가 되어 산업계를 제대로 감독할 수 없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한국 사회에선 정부 관리들이 산업계의 요직들을 실질적으로 독점하는 경향이 점점 깊어진다. 정부의 시장 개입이 점점 깊어지고 감독 기능이 점점 강화되자, 기업들이 아예 임원들을 전직 관리로 채우는 것이다. 게다가 정부의 인허가 절차가 복잡한 업종들에선, 인맥이 일 처리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므로, 전직 관리들만이 실제로 영업을 할 수 있다.”(49~50쪽)

길을 걸으며 만난 아름다운 풍경도 빼놓지 않는다. 현이립이 보는 것은 어린아이와 청소년, 젊은 여성이다. 복씨는 “나이를 먹으면 세상에 대해 관심은 줄고 고집이 생겨 공격적으로 변한다”며 “대신 젊은이들에게서는 희망을 본다”며 웃었다. 그는 “노인들에게는 기본 복지를 보장하고 젊은 세대는 맘껏 뛰어놀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

글을 쓰기 위해 항암치료를 거부했다는 말을 쉽게 이해할 수 없었다. 처음엔 잠을 잘 수 없을 정도로 괴로웠다고 했지만 지금은 평온한 모습이다.

“진단을 받고 나서 많이 힘들었어요. 두어 달 밤에 잠을 이룰 수 없을 정도로 고생했습니다. 머리로는 이해하려 해도 잠재의식이 받아들이지 못한 탓이죠. 하지만 글을 쓰는 것이 나에겐 치유라는 걸 알게 됐어요.”

투병 중에도 몇 권의 책을 낸 그의 집필욕은 여전히 왕성하다. 마음의 짐으로 남았던 《역사 속의 나그네》를 총 6권 분량으로 탈고했으며 올가을 출간할 예정이다. 그는 “《역사 속의 나그네》 속편을 몇 권 더 쓰고 힘닿는 데까지 여러 책을 쓸 계획”이라고 말했다.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가는 그의 손에는 사립탐정 ‘잭 리처’ 시리즈인 《원 샷》 원서가 들려 있었다. 한국 장르문학의 개척자다운 모습이었다.

박상익 기자 dir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