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정보 '돈벌이'에 악용] 유출돼도 평생 못바꾸는 주민번호…朴 "대안 검토하라"

입력 2014-01-27 20:49
수정 2014-01-28 04:19
朴대통령 "주민등록번호 대안 검토" 왜 나왔나

당혹스런 정부…"마땅한 대체수단 없어"


[ 임원기 / 류시훈 기자 ]
박근혜 대통령이 27일 오전 청와대 회의에서 주민등록번호를 대체할 개인 식별번호가 없는지 대안을 검토하라고 지시하자 금융당국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이날 비슷한 시간에 열린 금융위원회 브리핑에서 금융회사의 경우 주민번호를 대체할 마땅한 수단이 없다는 입장을 밝혔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민번호 시스템에 대한 박 대통령의 문제 제기가 나온 이상 현행 개인식별제도는 어떤 형태로든 수정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치명적 약점 세 가지

1968년 이른바 ‘김신조 사건’ 이후 간첩을 색출해내기 위해 고안돼 1975년부터 사용되기 시작한 주민번호는 그동안 갖가지 보안사고의 주 원인으로 지목됐지만 40년 가까이 명맥을 유지해오고 있다.

하지만 한국의 주민번호는 △평생 바꿀 수 없으며 △인터넷에서 손쉽게 수집이 가능하고 △이 번호를 통해 개인의 정체성을 완벽하게 파악할 수 있다는 점에서 치명적인 약점을 노출하며 오래전부터 해커 및 범죄집단의 표적이 돼왔다.

물론 다른 나라들도 국민의 신분을 확인하는 제도를 갖고 있지만 한국처럼 획일적으로 운영하는 곳은 없다.

미국의 경우 SSN(사회보장번호)을 비롯해 운전면허번호, 주(州)신분증번호 등 복수의 식별번호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SSN의 경우 사회복지 등 발급 목적에 맞는 분야에서만 사용되고 이유 없이 번호를 물어보는 것만으로도 처벌받을 수 있다. 개인이 원할 경우 번호를 바꾸는 것도 가능하다.

일본은 2002년부터 개정된 ‘주민기본대장네트워크’에 따라 전 국민에게 식별번호(국민배번호제)를 부여했다. 하지만 일상 생활에서는 별로 사용할 일이 없기 때문에 자신의 번호를 기억하지 못하는 일본인도 많다. 신분 확인이 필요할 때는 면허증번호, 의료보험증번호 등을 사용할 수 있다.

헝가리는 아예 법으로 개인식별번호 도입을 차단했다. 헝가리 헌법재판소는 1991년 판결문에서 “무제한적 이용을 위한 일반적이고 획일적인 개인식별표시는 위헌”이라고 결정했다.

○번번이 실패한 대체 수단

정부도 그동안 주민번호를 대체할 수 있는 다양한 수단을 강구해왔다. 대표적인 게 아이핀과 전자주민증의 도입이다. 하지만 아이핀 역시 주민번호 수집을 전제한다는 점에서 근본 대안은 아닌 것으로 판가름났다. 이번 개인 금융정보 유출 사고를 촉발한 신용정보업체 코리아크레딧뷰로(KCB)는 아이핀 발급을 위해 정부가 지정한 본인확인기관이었다.

2011년 현대캐피탈과 농협 전산망 해킹 사건이 난 뒤에는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현행 주민등록증을 IC칩이 내장된 전자주민등록증으로 갱신한다는 내용의 주민등록법 개정안이 국회에 상정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 역시 기존 주민번호 체제에서 벗어나지 못한 데다 전산화에 따른 정보 유출 위험이 더 커진다는 이유로 18대 국회에서 통과되지 못했다.

보다 근본적인 요인으로는 주민번호 하나만 알면 완벽하게 개인을 식별하는 편리함에 중독된 정부가 국민의 혼란, 막대한 예산 등을 핑계로 개혁의지를 갖지 않았다는 점이다. 실제로 오는 8월부터 시행되는 개인정보보호법에 따르면 공공기관과 민간사업자는 주민등록번호를 원칙적으로 수집할 수 없게 되지만 금융위는 ‘금융사는 예외로 할 것’을 추진하고 있다. 사상 최악의 정보 유출 사고에도 불구하고 주민번호를 대체해 본인을 확인할 수단이 없다는 게 이유다. 문송천 KAIST 교수는 “전 국민의 개인정보가 노출된 상태에서 주민번호는 이미 개인 인증 수단으로서 의미를 상실했다”며 “교체 가능하고 공공의 목적으로만 쓸 수 있으며 주민번호와 연계되지 않은 새로운 인증수단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임원기/류시훈 기자 wonki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