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켓인사이트][위기의 벤처 캐피털] (2) 4兆 벤처쓰나미, 제2의 ‘버블’ 경계령

입력 2013-09-16 15:25
벤처기업 기업가치 폭증…좀비 벤처캐피털 난립 우려도


이 기사는 09월05일(06:58) 자본시장의 혜안 ‘마켓인사이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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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기업에 부품을 납품하는 A중소기업은 요즘 행복한 고민에 빠졌다. 두달 새 국내 벤처캐피털 서너 곳으로부터 투자제안을 받았기 때문이다. 2년 전 운영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투자업계를 뛰어다녔지만, 결국 자금유치에 실패했던 A사였다. 아이러니 한 점은 매출은 늘지 않았는데 당시 보다 오히려 50% 이상 비싼 가격에 투자가치가 논의되고 있다는 점이다.

# 20대 B씨는 올초 벤처기업을 창업했다. 뚜렷한 사업계획 없이 우선 회사부터 차렸다. 멤버들만 잘 모아놓고 시장에서 유행하는 사업아이템만 갖다 써도 정부 창업자금을 받을 수 있다는 선배들의 조언(?)을 들었기 때문이다. 결국 사업 아이템으로 진입장벽이 낮은 모바일 어플리케이션을 택했다. 구색을 갖춘 뒤부터는 투자자들을 찾아다니는 데만 전념하고 있다.

정부가 국내 벤처기업 육성을 위해 내놓은 창업지원정책이 오히려 벤처생태계를 혼탁하게 하고 있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벤처기업들의 기업가치는 적정수준을 초과한 지 오래고, 청년들은 너나할 것 없이 창업전선으로 뛰어들고 있다. 앞으로 4조원 규모 정부발(發) 벤처쓰나미(벤처펀드)가 몰려올 경우 거품은 절정에 달해 2000년대 초와 같은 '벤처버블사태'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경계론이 확산되고 있다. 철저한 시장 진단 이후, 점진적으로 벤처지원자금을 늘려 나가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 역대 최대 '4조원' 벤처펀드 조성…작년 5배 넘어
벤처투자 업계에 따르면 올해 조성될 예정인 벤처펀드는 총 4조원에 육박한다. 금융위원회가 정책금융공사, 산업은행 등과 손잡고 조성하는 2조원 규모 성장사다리펀드와, 중소기업청이 대기업들을 투자자로 끌어들여 만든 6000억원 규모 미래창조펀드가 대표적이다. 여기에 국민연금, 모태펀드, 우정사업본부, 농업정책자금관리단 등의 메인 출자자(LP)들도 각자 수백억~수천억원의 벤처펀드를 조성하기로 했다. 일부 지방자치단체, 연기금, 대기업 등도 벤처펀드 열풍에 합세하고 있다.

벤처펀드 '4조원'은 역대 최대 규모다. 지난해 신규 벤처펀드 조성액(벤처캐피탈협회 자료)인 7477억원 보다 5배 이상 큰 수치다. 이전까지 최대규모의 벤처펀드가 조성됐던 2011년(2조2865억원, 67개) 보다도 두배 가량 큰 규모다. 현재 국내에서 운용되고 있는 전체 벤처펀드(9조3585억원)의 40%가 넘는 4조원의 펀드가 올 한해에만 조성되는 셈이다.

벤처펀드 재원이 늘어나면 신규투자도 증가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벤처펀드의 만기는 7~8년이며, 이중 운용사들이 투자할 수 있는 투자기간은 4년 정도다. 국내 벤처캐피털들의 신규투자는 2010년 1조원을 돌파한 이후 2011년 1조2608억원, 2012년 1조2333억원 등 매년 1조원 이상을 기록했다. 올 상반기에는 7878억원이 집행됐다. 올해 4조원의 벤처펀드가 새롭게 조성될 경우 (기조성된 벤처펀드를 감안해) 앞으로 매년 2조원 이상의 신규투자가 이뤄져야 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문제는 정부가 갑자기 대규모 자금을 풀면서 투자할 기업을 찾는 게 만만찮아졌다는 점이다. 벤처캐피털 간 투자경쟁이 심화되면서 울며겨자 먹기로 높은 기업가치를 평가해 주고 투자를 하는 경우가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예전에는 투자받기 어려웠던 업체도 최근에는 검토대상에 올려 놓고 있다"며 "그만큼 양질의 딜을 발굴하는 게 쉽지 않아졌으며, 운용사들의 리스크도 커졌다"고 말했다.

◆ '참신함' 빠진 '비슷한' 청년창업…무능력 벤처캐피털 난립 우려도
최근 들어 엔젤투자자들로부터 자금을 유치하려는 초기기업들의 수가 폭증하고 있다. 엔젤투자협회에 따르면 올 들어 매월 70여개의 초기기업(예비창업자 포함)이 투자를 요청하고 있다. 이는 지난해와 비교해 볼 때 두배 가량 높은 수치다. 하지만 대부분의 업체들은 양질의 사업아이템을 확보하고 있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협회 관계자는 "초기기업들이 가장 많이 하는 사업아이템은 모바일 어플리케이션"이라며 "대다수의 기업들이 비슷한 내용의 사업을 구상하고 있으며 이런 이유로 참신한 기업을 발굴하는 게 쉽지 않다"고 밝혔다.

정부자금은 쏟아지는데 이를 담을 '그릇'이 부족하다는 점도 문제다. 7월말 기준 국내 벤처캐피털은 총 103개다. 이는 2010년(103개)과 같은 수준이며, 2011년(105개), 2012년(105개) 보다는 오히려 줄었다. 시장에서 어느 정도 업력을 확보한 벤처캐피털들은 이미 충분한 벤처펀드를 조성해 운용하고 있다. 정부가 앞으로 대규모 펀드를 조성하면 이들 업체 뿐 아니라, 시장에서 검증되지 않은 신생 벤처캐피털들이 자금을 받아갈 가능성이 높다는 게 업계의 관측이다.

문화콘텐츠 부문이 대표적인 예로 꼽힌다. 문화체육관광부는 내년부터 1500억원씩 5년간 총 7500억원 규모 문화콘텐츠펀드를 조성한다고 밝혔다. 그동안 조성된 문화펀드 규모를 감안하면 운용사만 20곳 이상을 선정해야 하는 대규모 사업이 될 전망이다. 그런데 현재 국내에서 활동하고 있는 문화콘텐츠 전문 벤처캐피털은 5곳 안팎에 그치고 있다.

벤처캐피털 업계 관계자는 "능력을 갖추지 못한 벤처캐피털들이 난립할 조짐이 보이고 있다"며 "정부가 처음에는 우량 운용사 위주로 자금을 출자하겠지만, 이들이 모두 벤처펀드를 받아간 뒤에도 돈이 남으면 어쩔 수 없이 중소형 벤처캐피털에게도 기회가 갈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 시장조사 철저히 하고, 점진적 벤처펀드 키워야
업계 전문가들은 정부의 대규모 펀드조성이 벤처거품 양성으로 이어지지 않으려면 '벤처투자 인프라'를 먼저 갖춰야 한다고 한 목소리를 낸다. 시장에서 대규모 자금을 소화할 능력을 키우도록 시간을 충분히 갖고, 점진적으로 자금을 투입해야 한다는 것. 벤처기업들이 필요한 자금규모를 파악하고, 기존에 조성한 펀드들이 정상적인 가격으로 투자집행 되고 있는 지를 모니터링을 하는 과정이 선행돼야 한다는 의견이다.

업계 관계자는 "정부가 벤처육성을 천명한 뒤 부처 간 경쟁처럼 벤처펀드를 쏟아내고 있다"며 "철저한 사전조사 없이 한두달 만에 출자계획을 만들어 내놓고 있는데, 수년 뒤 펀드만기가 돌아오면 투자집행 및 수익률 등의 문제를 어떻게 감당할 지 의문"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거품을 만들지 않으려면 시장에 대규모 자금을 풀기 보단 한 단계씩 밟아 나갈 수 있는 벤처육성정책을 확립하는 게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오동혁/심은지 기자 donghuip@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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