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숭례문과 한국의 혼

입력 2013-05-03 17:21
수정 2013-05-04 04:22
전통 기법으로 다시 부활한 국보 1호
편리함 좇기보다 한국혼 지켜나가길

피터 바돌로뮤 英왕립아시아학회 이사


숭례문은 외국에서 친구들이 오면 일부러 데려가는 곳이었다. “봐라, 서울에는 시내 한가운데에 이렇게 600년 전에 지은 역사 깊은 건축물이 있다”고 자랑했다. 그래서 더 충격이었다. 출근길에 불에 탄 숭례문을 보고 너무 놀라 하마터면 앞차를 들이받을 뻔했다.

따지고 보면 그리 놀라운 일도 아니었다. 45년간 한국에 살면서 문화재가 홀대받는 모습을 숱하게 지켜봤기 때문이다. 한국의 문화적 가치를 간직하고 있는 역사 깊은 한옥이 헐려 사라질 때마다 한국인 조상들이 “이놈들아!”하고 호통을 칠 것 같았다.

1968년 평화봉사단원으로 한국에 와서 강릉에 있는 99칸짜리 사대부 고택인 선교장에서 살았다. 내게 한국 문화와 한옥에 대한 관심을 갖게 해준 집이다. 당시 1890년대에 출생하신 할머니가 살고 계셨는데, 매일 할머니를 찾아가 그곳에 살게 해 달라고 졸랐다. 그런 나를 기특하게 여기셨는지 할머니는 “네가 청소할 수 있는 만큼 방을 차지하고 살아라”하고 허락하셔서 4년 넘게 그곳에서 살았다. 서울에 올라와 아파트 생활을 잠깐 했지만 흙을 밟을 마당도 없고 너무 답답해서 지금 살고 있는 한옥으로 이사해 40년 넘게 살고 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는 동안 서울시내에 50만 채가 넘던 한옥이 이제 4000채도 남지 않았다. 오늘도 계속 철거돼 없어지고 있다. 한국의 혼 같은 한옥을 뜯어내고 아파트를 지은 뒤 돈 벌었다며 좋아하는 일이 많았다. 문화재도 마찬가지다. 관광안내 책자마다 숭례문 사진을 실어놓고 정작 방재예산 편성에는 인색했으니 얼마나 섭섭했겠는가. 600년이나 곁을 지켰는데 너무 돌봐주지 않으니까 화가 나서 훌쩍 떠나버린 것만 같았다.

숭례문이 오늘날까지 살아남은 것은 그야말로 기적이었다. 일제 강점기 때 고궁부터 지방 관아까지 문화적 가치가 높은 조선시대 건물 대부분이 철거될 때도 숭례문은 기적처럼 살아남았다. 숭례문을 볼 때마다 그 기적 같은 행운을 입는 느낌이 들어 정말 행복했다.

처음 문화재청이 2~3년 안에 숭례문을 완전히 복구하겠다고 했을 때 못마땅했다. 조선시대에는 최고의 목재를 골라 말리는 데만 3~4년이 걸리고 명장들이 고심을 거듭해 나무의 물결무늬까지 신경 써서 건물을 지었는데 한국인들이 그런 정성 어린 마음을 잊어버린 것 같아 아쉬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난 과정을 보면 그런 걱정은 기우였던 것 같다. 값싸고 보기 좋은 재료로 흉내만 낸 게 아니라 좋은 재료로 최고의 장인들이 진짜 조상의 기법까지 그대로 따라 복구한 것이다. 철저한 고증을 통해 지난 세월 잘못 복원했던 것까지 바로잡았다고 하니 여간 반가운 일이 아니다.

편리함만을 좇는 시대에 이제부터라도 한국의 혼을 제대로 느끼고 지켜나가길 간절히 바란다. 외국에 사는 친구들에게 숭례문을 자랑할 생각에 벌써부터 마음이 설렌다.

피터 바돌로뮤 < 英왕립아시아학회 이사 >


▶ 장윤정 '10년 수입' 탕진한 사업 뭔가 봤더니

▶ 한국女 '글래머' 비율 봤더니…이럴 줄은

▶ 국가대표 男, 사업하다 20억 잃고 노숙을…

▶ 아이유, 사기 당해 잃은 돈이…충격

▶ 류현진, LA서 샀다는 고급아파트 값이 '깜짝'

[한국경제 구독신청] [온라인 기사구매] [한국경제 모바일 서비스]

ⓒ <성공을 부르는 습관> 한경닷컴,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한국온라인신문협회의 디지털뉴스이용규칙에 따른 저작권을 행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