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분투칼럼] 아프리카 알고보면(20) 기념품이 된 짐바브웨 화폐
이은별 한동대학교 커뮤니케이션학부 조교수
[※ 편집자 주 = 연합뉴스 글로벌문화교류단이 국내 주요 대학 아프리카 연구기관 등과 손잡고 '우분투 칼럼'을 게재합니다. 우분투 칼럼에는 인류 고향이자 '기회의 땅'인 아프리카를 오랜 기간 연구해온 여러 교수와 전문가가 참여합니다. 아프리카를 다양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분석하는 우분투 칼럼에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을 기대합니다. 우분투는 '당신이 있어 내가 있다'는 뜻의 아프리카 반투어로, 공동체 정신과 인간애를 나타냅니다.]
2008년 국제뉴스에 달걀 3알을 사기 위해 1천억 짐바브웨 달러를 내는 보도 사진이 실렸다. 수레에 돈뭉치를 한가득 싣고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의 모습도 전 세계인을 놀라게 했다. 그 시절을 겪은 짐바브웨 사람들은 돈을 실은 수레에서 잠시 한눈을 팔면 지폐는 바닥에 쏟아버리고 수레만 훔쳐 갔다고 회상했다. 말 그대로 짐바브웨 달러는 불쏘시개에 불과한 종이였다. 그로부터 15년이 지나 필자가 짐바브웨에 머물 때도 초인플레이션의 기억은 쉽게 지워지지 않은 듯했다. 2023년 2월부터 불과 넉 달 남짓한 기간 동안 수도 하라레의 대형마트 픽앤페이(Pick N Pay) 입구에 놓인 바나나 판매대는 필자에게 일종의 물가 지표였다. 같은 자리의 가격표 숫자가 10배 가까이 뛰는 모습을 보며 짐바브웨 경제의 불안정성을 실감할 수 있었다.
가격표만 보면 바나나 가격이 폭등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당시 짐바브웨 달러(ZWL)와 미국 달러(USD)의 환율을 들여다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2023년 2월 바나나 1㎏ 가격은 999.99 ZWL이었지만, 석 달 뒤인 5월 말에는 3,499.99 ZWL, 다시 보름여가 지난 6월 중순에는 10,499 ZWL로 치솟았다. 넉 달 사이 가격표의 숫자가 열 배 넘게 불어난 것이다. 그러나 이를 미국 달러로 환산하면 각각 약 1.15 달러, 1.36 달러, 1.59 달러였다. 바나나가 열 배 비싸진 것이 아니라 짐바브웨 달러 가치가 그만큼 빠르게 무너지고 있었던 것이다. 상황이 이러하니 현지 화폐로 임금을 받는 노동자의 삶은 팍팍해질 수밖에 없다. 당시 짐바브웨 학교 교사들은 미화 300달러와 60만 ZWL을 섞어 월급으로 받기도 했다. 가령 급여 받은 날의 환율이 1달러당 20,000 ZWL이라면 60만 ZWL은 30달러의 가치가 있지만, 며칠 뒤 1달러당 25,000 ZWL로 떨어지면 같은 돈은 24달러가 된다. 이들에게 자국 화폐 가치의 하락은 단순한 환율 변동이 아니었다. 같은 월급으로 살 수 있는 생필품의 수가 줄어드는, 사실상 임금 삭감이었다.
결국 이듬해인 2024년 4월 짐바브웨 정부는 새로운 화폐 지그(ZiG·Zimbabwe Gold)를 발표했다. 15년 넘게 일상 경제를 지배해 온 미국 달러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려는 정책이었지만, 동시에 짐바브웨 화폐의 혼란스러운 역사를 고스란히 드러내는 것이기도 했다. 1980년 4월 18일 로디지아에서 짐바브웨로 독립한 뒤 자국 화폐인 '짐바브웨 달러'를 발행했지만, 치솟는 물가를 잡지 못하면서 고액권 발행과 액면가의 0을 떼어내는 화폐 개혁을 거듭했다. 정부는 평가절하된 자국 화폐를 되살리기 위해 '선라이즈 프로젝트'(Sunrise Project)라는 이름의 화폐 개혁에도 나섰지만, 상황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2008년 9월에는 전년 동월 대비 인플레이션율이 약 5천억%에 달했고, 이듬해 1월에는 'one hundred trillion dollars'라고 적힌 100조 달러 지폐까지 등장했다. 숫자 '0'만 무려 14개였다.
통제 불능에 빠진 정부는 자국 화폐를 사실상 포기하고 미국 달러화(USD)와 남아공 랜드화(ZAR)를 공식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거듭된 화폐 혼란 속에서 자국 화폐에 대한 신뢰를 잃은 국민들이 외화를 선호하게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이후 10년간 다중통화체제를 유지하던 짐바브웨는 2019년 다시 '짐달러(Zimdollar)' 혹은 RTGS라 불리는 자국 통화를 부활시켰다. 하지만 이 화폐 역시 미화 1달러당 3만 짐달러 수준까지 떨어졌고, 다시 기념품으로 밀려났다. 하라레 아본데일(Avondale) 시장에서 기념품 상점을 운영하는 타오(Tao)는 새 화폐인 지그로 교환하지 않은 짐달러 지폐 뭉치를 보여주며 언젠가 액자 속 옛 지폐들처럼 관광객에게 판매할 것이라고 말했다.
짐바브웨에서는 이러한 화폐의 위계가 일상에서도 선명하게 드러난다. 심하게 때가 타고 해져 조지 워싱턴의 초상화를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의 미화 1달러 지폐도 좀처럼 폐기되지 않는다. 소액권 자체가 귀한 탓에 지폐로서 수명을 다한 듯한 1달러도 "돈은 돈이지" 하며 버젓이 거래된다. 반면 0.5달러짜리 비누를 사고 1달러를 내면 미화 50센트 동전 대신 지그가 거스름돈으로 돌아오기도 한다. 공식적으로 자국 화폐가 존재하지만 실제 거래 기준은 달러이고, 지그는 그 달러 흐름의 빈틈을 메우는 역할에 가깝다. 정부가 탈달러화(dedollarization)를 추진한다 해도, 결국 관건은 국민들이 자국 화폐를 다시 믿을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한때 수레째 버려지던 짐바브웨 지폐는 이제 기념품 가게의 액자에 담겨 관광객을 기다린다. 화폐로서 가치를 잃고 나서야 비로소 상품으로 값을 얻게 된 셈이다. 새 화폐에 '금(gold)'이라는 이름을 붙일 만큼, 짐바브웨 사람들이 잃어버린 것은 돈 그 자체가 아니라 돈에 대한 믿음이었다. '아프리카 알고보면' 깨닫게 된다. 화폐의 진정한 가치는 지폐에 적힌 숫자가 아니라 신뢰가 매긴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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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은별 교수
현 한동대 커뮤니케이션학부 조교수, 성균관대 컬처앤테크놀로지융합전공 초빙교수, 한국외대 미디어외교센터 전임 연구원 역임. 에세이 '경계 밖의 아프리카 바라보기, 이제는 마주보기' 외교부 장관상 수상, 저서 '시네 아프리카' 세종도서 선정 및 희관언론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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