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시선] 美 남부에서 공용어 대접 받는 스페인어

입력 2023-09-03 07:07
[특파원 시선] 美 남부에서 공용어 대접 받는 스페인어

캘리포니아·텍사스주 인구 40%가 히스패닉…LA는 49%로 백인 압도



(로스앤젤레스=연합뉴스) 임미나 특파원 = 미국 로스앤젤레스(LA)에서 6개월여간 살면서 적잖이 놀란 것 중 하나는 이 지역의 인구 구성이다.

미국 남서부에 스페인어를 쓰는 히스패닉 인구가 많다고 듣긴 했지만, 이렇게나 많을 줄은 몰랐다.

집 근처를 산책할 때나 마트에서 장을 볼 때, 관공서에서 줄을 서서 순서를 기다릴 때 등 어딜 가든 백인보다 훨씬 많이 보게 되는 인종이 히스패닉이었다. 예상과 달리 오히려 흑인을 찾아보기가 어려웠다.

밖에 나가면 주변에서 영어보다 스페인어가 들릴 때가 더 많은 지경이었다.

한번은 집에 문제가 생겨 건물 관리팀에서 수리해주러 왔는데, 중간에 잠시 혼자 남게 된 히스패닉 청년이 영어를 전혀 하지 못해 소통이 불가능했던 적도 있다. '미국에 오기 전에 차라리 스페인어를 공부했어야 하나' 싶을 정도였다.

이런 상황은 통계로도 알 수 있다.



미 인구조사국의 2020년 통계를 보면 미국 50개 주 가운데 멕시코와 국경을 맞댄 캘리포니아주와 뉴멕시코주는 히스패닉·라틴계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뉴멕시코주는 인구의 47.7%가 히스패닉·라틴계로, 백인(36.5%)을 압도한다. 뉴멕시코주 옆에 있는 텍사스주는 백인(39.7%)과 히스패닉·라틴계(39.3%)가 비슷한 비중이다.

캘리포니아주 역시 히스패닉·라틴계 인구가 39.4%로, 백인(34.7%)보다 더 많다.

약 1천만 명이 사는 로스앤젤레스 카운티로 범위를 좁혀보면 히스패닉 비중이 더 압도적이다. 전체 인구의 49.0%가 히스패닉·라틴계이고, 백인은 그 절반 정도인 25.2%에 불과하다. 아시아계는 15.8%, 흑인·아프리카계는 9.0%다.

이는 필자가 동네에서 피부로 체감하던 것과 거의 비슷한 수치다.

여러 집단이 모여 살 때 각 집단의 '머릿수'는 그 사회에서 갖는 영향력과 직결될 수밖에 없다. 특히 민주주의 정치 체제를 표방하는 나라에서는 선거마다 한 사람이 한 표씩을 행사하므로 인구가 많은 집단이 자신들을 대변하는 우두머리를 뽑고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된다.

캘리포니아주에서 이민자들에게 좀 더 포용적인 정책을 펴는 민주당이 주 정부와 의회 등의 정치권력을 장악하게 된 것도 이런 인종 구성이 반영된 결과로 볼 수 있다.

캘리포니아에서는 주 정부를 비롯해 공립학교와 각종 공공기관, 민간 기업들까지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대부분의 문서에 스페인어를 공용어처럼 병기하고 있다.

전기요금, 가스요금, 인터넷 요금 등 매월 날아오는 각종 고지서의 봉투를 열고 두툼하게 접힌 여러 장의 종이를 펼쳐보면 같은 내용을 적은 문서가 영어와 스페인어 두 가지 버전으로 함께 들어있다.



공공 기관과 민간 기업의 고객센터에도 대부분 스페인어 상담원이나 상담 번호가 따로 있다.

주지사나 경찰서장 등이 공식 기자회견을 할 때는 스페인어 통역을 순차로 진행해 시간이 두 배로 걸린다.

아시아계 이민자 입장에서 보면 부러운 부분이고, 약간의 박탈감마저 느껴진다.

이런 환경에서 살다 보니 지난 6월 소수인종 우대정책 '어퍼머티브 액션'(Affirmative Action) 유지 여부에 대한 연방 대법원의 판결을 앞두고 관련 기사를 쓰면서 머릿속에 의문부호가 떠나지 않았다.

어퍼머티브 액션은 미국 대학들이 입학 전형에서 흑인이나 히스패닉 학생들에게 가점이나 우선권을 줘온 정책으로, 아시아계 학생들이 이에 반기를 들고 주요 대학인 하버드대와 노스캐롤라이나 주립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 것이었다.

미국 전체 인구를 보면 백인(57.8%)이 가장 많고, 히스패닉·라틴계(18.7%), 흑인·아프리카계(12.1%) 순이다.

미국 언론이 이 주제에 대해 심층적으로 분석한 기사들을 읽다 보니 흑인의 경우에는 여전히 소수이고 역사적으로 차별을 받아왔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 이해가 됐는데, 히스패닉은 좀 다른 차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미 남부 국경을 넘어오는 이민자들을 포함해 히스패닉 인구는 점점 많아지는 추세이고, LA 같은 대도시에서 이미 주류로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데, 우대가 필요한 소외 계층으로 볼 수 있을까.

지난해 10월에는 라틴계인 누리 마르티네스 LA 시의회 의장이 백인 동료 의원이 입양한 흑인 아이를 두고 "원숭이 같다"는 등의 인종차별적인 비하 발언을 한 사실이 폭로돼 의장직에서 사퇴한 일도 있었다.



mina@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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