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해변엔 검은 타르 덩어리만…인적 뚝 끊긴 미 '서핑 도시'
캘리포니아 기름 유출 사고에 해변 폐쇄, 곳곳 경고문…상가 '울상'
해초와 뒤엉킨 '타르 볼' 떠밀려와…"정화 작업에 몇 달 걸릴 것"
(로스앤젤레스=연합뉴스) 정윤섭 특파원 = 내리쬐는 햇볕 아래 서퍼는 파도를 가르고, 백사장에선 건장한 젊은이들이 비치발리볼 경기를 즐기는 곳.
미국 캘리포니아주 남부 해안 도시 헌팅턴비치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하지만 6일(현지시간) 기자가 찾은 헌팅턴비치는 적막감만 감돌았다.
나흘 전 발생한 기름 유출 사고의 직격탄을 맞았기 때문이다.
오렌지카운티 헌팅턴비치 인근 해상 석유 시추 시설에서 뻗어 나온 해저 송유관이 파손되면서 54만L의 원유가 바다로 콸콸 쏟아진 것이다.
사람과 야생 동물에 해로운 물질을 가득 품은 원유가 바다에 퍼지면서 15㎞에 걸친 헌팅턴비치 해변은 완전히 폐쇄됐다.
헌팅턴비치의 별칭은 '서프 시티'(Surf City)다.
근대 서핑의 아버지로 불리는 조지 프리스와 듀크 카하나모쿠가 20세기 초 여기서 서핑 실력을 키웠고 미국 서핑 챔피언십 대회도 이곳에서 처음으로 열렸다.
재정적 여유가 있는 백인들이 주로 모여 살며 캘리포니아 남부 특유의 해변 문화를 엿볼 수 있는 도시이기도 하다.
그러나 기름 유출 사고로 물놀이는 금지됐고 그 많던 서퍼들은 자취를 감췄다.
나들이객으로 항상 붐볐던 헌팅턴비치 부두는 인적이 거의 끊겼다.
부두에서 만난 60대 주민 러셀 씨는 "해변에는 서퍼도, 보트도 없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일종의 드라마틱한 장면"이라며 "서핑 스쿨은 문을 닫았고 낚시객을 싣고 나르는 보트도 영업을 중단했다"고 안타까워했다.
해변 인근 상점은 문을 열어놨지만, 손님은 거의 없었다.
기념품 가게를 운영하는 브라이언 씨는 "사람들이 바다에 들어가는 것을 당국이 통제하고 있다. 길거리에는 사람이 거의 없다"며 "기름 유출 사고가 우리 장사에는 절대 긍정적이지 않다"고 걱정했다.
점심 무렵 식당에는 빈 좌석만 가득했다.
해산물 식당 종업원 페르난도 씨는 "손님이 뚝 끊겼다"며 기자에게 텅 빈 웨이팅 리스트를 보여줬다.
그는 "사고 직후 며칠 동안 역한 기름 냄새 때문에 손님이 없었다"며 "지금은 기름 냄새가 거의 사라졌지만, 여전히 발길이 끊긴 상황"이라고 말했다.
사고 수습 당국은 해상 기름띠 제거와 정화 작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지만, 해변에서는 여전히 사고의 흔적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원유의 휘발 성분이 날아가고 남은 찌꺼기가 굳어서 생긴 검은 '타르 볼'(Tar Ball)은 해변 곳곳에 해초와 뒤엉킨 채 널려있었다.
한 주민은 '타르 볼'을 살펴보는 기자에게 독성이 있을 수 있다며 맨손으로 만지지 말라고 주의를 줬다.
헌팅턴비치에서 남쪽으로 8㎞ 떨어진 뉴포트비치도 사정은 비슷했다.
해변 입구에는 "기름 유출로 폐쇄됐다"는 내용을 담은 이동식 전광판이 설치됐고 모래사장에는 '수영 금지'라는 임시 경고 푯말이 세워졌다.
기름에 오염된 모래를 수거하는 작업은 뉴포트비치 해변에서 한창 진행 중이었다.
방호복으로 무장한 일꾼들은 삽으로 모래를 걷어내 봉지에 옮겨 담았고 연신 차로 실어날랐다.
정화 작업반의 한 관계자는 "오염 물질 제거 작업은 몇 달이 족히 걸릴 것"이라고 전했다.
이번 기름 유출 사태를 두고 집단 소송이 제기된 가운데 현지 주민들은 당국의 초동 대처가 늦었고 석유 시추 회사가 송유관 관리를 안이하게 했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러셀 씨는 "환경 활동가들이 분노하고 있다"며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가 아니었다면 모든 사람이 나가서 이번 사태에 대해서 시위를 해야 할 판"이라고 말했다.
기름 유출 사고 피해 지역을 관할하는 한국계 미셸 박 스틸 연방하원의원은 사고 수습 당국의 늑장 대응 논란과 관련해 "이것은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이라며 조 바이든 대통령에게 연방정부 차원의 전면적인 조사를 요청하는 서한을 발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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