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태수, 해외도피 11년만에 무연고자로 생 마감…장례비 100만원
"일본서 치료받겠다"며 말레이시아 출국…카자흐스탄 거쳐 키르기스스탄으로
2010년 에콰도르 정착해 유전사업 시도한 듯…검찰, 은닉재산 추적 과제
(서울=연합뉴스) 박초롱 기자 = IMF(국제통화기금) 외환위기의 서곡을 울렸던 '한보 사태' 장본인 정태수 전 한보그룹 회장이 에콰도르에서 지난해 말 숨을 거둔 것으로 공식 확인됐다.
정 전 회장은 한때 한보그룹을 재계 14위까지 올려놓으며 사세를 확장했으나, 2천225억원에 달하는 체납액을 남긴 채 도주자로 95년 생애를 마감했다.
다른 사람 신분을 빌려 살았기에 '무연고자'로 치러진 그의 장례식 비용은 900달러(한화 약 105만원)였다.
4일 검찰 등에 따르면 정 전 회장이 해외로 도피한 것은 2007년 5월 2일이다.
당시 그는 자신이 이사장으로 있던 대학교의 교비 65억원을 횡령한 혐의로 항소심 재판을 받고 있었다. 2006년 있었던 1심에선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출국금지 상태였던 정 전 회장은 신병 치료를 위해 일본으로 출국해야 한다며 법원에서 출국금지처분 집행정지를 받아냈다.
그러나 그가 향한 곳은 일본이 아닌 말레이시아였다. 곧바로 다시 카자흐스탄으로 이동해 자리잡았으나 그곳 생활은 길지 않았다.
정부가 2008년 1월 카자흐스탄과 범죄인 인도협약을 맺자 그해 4월께 키르기스스탄으로 거처를 옮긴다. 한국과 범죄인 인도 협약을 맺지 않은 나라를 택한 것이다.
정 전 회장은 키르기스스탄에서 2년여를 지내며 고려인으로 추정되는 1929년생 '츠카이 콘스탄틴(TSKHAI KONSTANTIN)'이라는 인적사항을 이용해 위조 여권을 발급받는다. 정 전 회장은 1923년생이다.
위조 여권으로 2010년 7월 15일 에콰도르에 입국한 정 전 회장은 숨을 거둘 때까지 에콰도르 제2의 도시 과야킬에서 '츠카이 콘스탄틴'으로 살았다.
그는 끝까지 사업에 대한 의지를 잃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검찰은 정 전 회장이 유전개발 사업을 하려고 에콰도르를 거처로 삼은 것으로 보고 있다. 과거 한보그룹 계열사인 동아시아가스가 에콰도르에서 사업을 벌였다.
정 전 회장의 건강이 나빠지자 2015년부터는 역시 해외 도피 중이던 넷째 아들 한근(54) 씨가 에콰도르로 와 함께 살며 정 전 회장을 돌본 것으로 조사됐다.
신장이 좋지 않아 오랫동안 투석 치료를 받았다는 정 전 회장은 지난해 12월 1일(에콰도르 현지시간) 숨졌다.
정 전 회장도, 한근 씨도 타인의 신분을 빌려 살았기에 서류상 부자 관계는 인정되지 않았다. 정 전 회장은 무연고자로 사망 처리됐다.
시신은 사망 바로 다음 날 화장됐다.
장례식에 다른 가족이 참여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닌 데다 표면상 무연고자였기에 모든 절차가 신속하게 이뤄졌다. 장례식에 참석한 가족은 한근씨가 유일했다.
정 전 회장의 네 아들 중 셋째 보근씨는 645억원의 국세 체납 문제로 출국금지를 당한 상태다. 보근씨는 2015년 출국금지를 풀어달라는 소송을 냈으나 법원은 "아버지와 동생이 한보그룹 부도 이후 막대한 재산을 다양하고 치밀한 방법으로 숨기고 해외 도피시키는 데 직접 관여한 것으로 추정된다"며 "원고(보근씨)가 해외로 출국해 이들과 다시 접촉하면 가족의 은닉재산을 해외로 도피시킬 방안을 물색할 것"이라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지명수배를 당한 또 다른 아들은 행방이 묘연한 상태다.
정 전 회장의 장례비용으로는 900달러(105만원)가 들었다고 검찰은 설명했다. 검찰은 정 전 회장의 사망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사망확인서, 사망등록부, 장례비용 영수증 등 각종 서류를 확보했다.
정 전 회장의 사망을 확인한 검찰에는 지난한 과제가 남았다. 일가가 은닉하거나 차명으로 가진 재산을 찾아내 추징하는 일이다.
정 전 회장이 남긴 막대한 체납액은 2004년 현재 2천225억원에서 단 한 푼도 줄어들지 않았다. 보근씨는 한보그룹 부도 이후 2015년까지 18년간 770만원을 납세했을 뿐이다. 한근씨가 내지 않은 세금 294억원, 정 전 회장의 지방세 체납액(49억9천만원)까지 합치면 삼부자의 체납액은 3천214억원에 이른다.
'한보 사태'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chopark@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