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에 '타이중 의거' 조명하 의사 동상 건립됐다
서울대공원 동상과 '쌍둥이'…조 의사 동상 건립에 국고 첫 지원
대만 학자 "조명하, 대만서도 '열사'로 재조명되고 있어"
(타이베이=연합뉴스) 차대운 특파원 = 일제강점기 대만에서 일왕 장인에게 독검을 날려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조명하 의사(1905∼1928년).
그간 다른 저명한 독립운동가들과 비교해 상대적으로 조명을 받지 못했던 조 의사의 숭고한 애국정신을 기리는 동상이 그가 순국한 대만 땅에 새로 들어섰다.
조명하 의사 연구회는 11일 교민들과 주(駐)타이베이 한국대표부 관계자 등이 참석한 가운데 대만 타이베이(臺北)시 한국학교 교정에서 조명하 의사 동상 제막식을 개최했다.
이날 공개된 조 의사의 입상은 한국에서 제작돼 최근 대만으로 옮겨져 설치됐다.
새 동상은 1988년 서울대공원에 세워진 조 의사 입상과 같은 모양으로 제작된 '쌍둥이 동상'이다.
앞서 1978년 대만 교민들은 십시일반 성금을 모아 조 의사 흉상을 만들어 한국학교 교정에 설치한 바 있다.
그런데 당시 동상 제작 기술의 한계와 조 의사 관련 사료 부족 등의 원인으로 흉상 얼굴이 조 의사의 사진 속 얼굴과 차이가 크다는 지적이 있어 조 의사 의거 91주년을 계기로 이번에 새 입상이 설치됐다.
조 의사의 후손들은 대만 교민들의 소중한 정성을 모아 만들어진 기존의 흉상을 국내의 다른 기관에 기증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조 의사의 새 동상 제작에는 처음으로 국가 예산이 투입됐다는 점에서 의미가 남다르다.
1978년 만들어진 흉상은 대만 교민들이 모은 돈으로, 1988년 서울대공원 동상은 조 의사의 후손들이 직접 마련한 돈으로 제작·설치됐다.
조 의사의 장손인 조경환(63) 씨는 "교민들의 정성을 모은 기금으로 이역만리에 흉상이 세워진 지 41년 만에 이제는 나라가 뜻을 기려 새로 동상을 만들어주게 되어 감회가 무척 새롭다"고 말했다.
조 의사는 1928년 5월 14일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일본의 지배하에 있던 대만의 타이중(台中)시에서 히로히토(裕仁) 일왕의 장인인 구니노미야 구니요시(久邇宮邦彦) 육군 대장을 독이 든 칼을 들고 습격했다.
구니노미야는 조 의사가 던진 독을 바른 독검에 찰과상을 입고 목숨을 건진 듯했지만 이로부터 8개월 만인 이듬해 1월 복막염으로 사망하게 된다.
조 의사는 '황족 위해죄'로 사형을 선고받고 1928년 10월 10일 타이베이 형무소에서 순국했다.
'친왕(親王) 전하'로 불리던 구니노미야는 일본이 신성시하던 이른바 '황족'의 일원으로 당시 일왕의 장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일본 군부와 정계에 막강한 영향을 끼치는 실력자였다는 점에서 조 의사의 '타이중 의거'는 일제에 큰 충격을 안겼다.
하지만 조 의사의 의거지가 독립운동의 주 무대가 아닌 대만이었다는 점, 순수한 단독 거사여서 의거를 증명하고 기려줄 동료들과 조직이 없던 점, 1992년 대만과의 단교 등이 복합적으로 영향을 끼쳐 그간 조 의사의 의거는 국내에서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조명하 의사 연구회 회장인 호사카 유지 세종대 교수는 동상 제막식에 이어 열린 한·대만 학자 좌담회에서 "의거 대상자가 일왕으로부터 가까운 사람인지, 일제에 준 충격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기준으로 볼 때 (일본강점기 때) '4대 의거'는 안중근, 이봉창, 조명하, 윤봉길 의사의 의거가 된다"며 "1928년 조명하 의사의 의거는 1932년 1월 이봉창, 1932년 2월 윤봉길 의사의 의거로 이어졌다"고 지적했다.
이어 발표에 나선 황메이어(黃美娥) 대만대 교수는 "과거 대만에서 조명하는 일본이 남긴 기록의 영향으로 '살인범'으로 인식되어 왔지만 최근 활발한 새로운 연구가 이뤄지는 가운데 '열사'로서의 면모가 재조명되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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