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 덕에 60년, 잊지 않겠다"…절창 끝에 눈물 쏟은 이미자

입력 2019-05-09 16:34
수정 2019-05-10 12:28
"여러분 덕에 60년, 잊지 않겠다"…절창 끝에 눈물 쏟은 이미자

'노래 인생 60년 기념 음악회' 어버이날 첫 무대

60인조 오케스트라 연주로 히트곡 선사…3천여 관객 환호



(서울=연합뉴스) 이은정 기자 = '나 그대와 함께 노래하며/ 여기 있으니 난 행복해요/ 감사하여라.'

엔딩곡으로 60주년 기념곡 '내 노래, 내 사랑 그대에게'를 부르던 이미자(78)는 마지막 소절에서 흐느꼈다. 공연 내내 가사를 칼같이 재단하던 발음도 북받친 감정에 뭉개졌다. 그는 무대 뒤로 가 눈물을 닦고 마음을 진정하고서야 다시 관객 앞에 섰다.

진행자 김동건이 공연을 마친 소감을 묻자 목이 멘 듯 쉽사리 입을 떼지 못했다. 1959년 '열아홉 순정'으로 데뷔한 지 60년. 어느덧 우리 나이로 79살이 돼 19살 때부터 품은 노래를 꺼내는 그 벅찬 심정을 누가 헤아릴까. 백발이 성성한 관객 중엔 함께 눈물을 훔치는 이들도 있었다.

"이미자가 여기까지 올 수 있도록 만들어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이미자)

어버이날인 지난 8일 오후 7시 30분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이미자 노래인생 60년 기념 음악회' 첫날 공연이 열렸다. 무대 천장에는 노란 전구가 박힌 '60'이란 조형물 아래로 다섯 송이 동백꽃이 크게 내걸렸다.

이번 공연은 그가 '은퇴'란 단어를 입 밖에 내고서 연 무대다. 데뷔 50주년, 55주년 때도 "마지막 무대일지 모르겠다"던 그는 진짜 노래 인생 끝자락을 준비하는 듯했다.



그 때문인지 김동건은 "이미자 씨는 조물주로부터 100년 쓸 성대를 받아 이대로만 가면 100주년 공연도 가능하다"며 "100주년에 초대받으려면 미친 듯이 박수를 쳐야 한다"고 거듭 말해 웃음을 안겼다.

"웬걸요. 아무래도 성량이나 가창력은 그전보다 힘이 없어요. 그래도 '열심히 하고 있구나'라고 느끼신다면 다행으로 생각합니다."(이미자)

그러나 이미자의 고음은 60인조 오케스트라의 웅장한 선율을 쩌렁쩌렁하게 뚫고 나왔다. 앳된 단발머리 시절 곡도 '원곡 키'로, 박자를 '밀당'하지 않고 정직하게 소화했다. 배에서 끌어 올리고 머리를 울려내는 소리는 구성지고 다부졌다. 한 음절로 길게 소리를 뱉으면서도 강약을 주는 바이브레이션은 찡하게 파고들었다. "어떻게 이렇게 노래를 잘하는 겁니까"란 김동건의 칭찬은 관객과 같은 마음이었다. 작은 체구에 팔순을 앞둔 나이가 가늠되지 않는 절창(絶唱)이었다.

은빛이 도는 하얀 드레스를 입고 등장한 이미자는 첫곡 '노래는 나의 인생'으로 시작을 알렸다.

'뒤돌아보면은/ 외로운 길/ 비를 맞으며/ 험한 길 헤쳐서/ 지금 나 여기 있네 (중략) 나와 함께 걸어가는/ 노래만이 나의 생명'('노래는 나의 인생' 중)

노랫말처럼 외롭고 힘겨운 순간도 있었다. 전통 가요 외길에서 천박한 노래라는 꼬리표에 서글펐다. 1964년 '동백 아가씨'가 TV 가요 차트에서 35주간 1위를 해도 그의 노래는 '왜색이 짙다', '비탄조'라며 금지곡이 되는 고초를 겪었다. 그럴 때마다 최희준, 패티김 등 발라드로 순탄하게 노래하는 동료들이 부러웠다. 지금은 모두 그리운 얼굴이다.

이날 이미자는 현미의 '떠날 때는 말 없이'와 2013년 은퇴한 패티김의 '연인의 길', 지난해 세상을 떠난 최희준의 '종점' 등 동시대 노래를 절절한 창법으로 윤색했다.



평생 전통 가요의 자부심으로 지탱해온 이미자답게 그 원형인 시대 명곡을 어김없이 골랐다.

"우리 선배님들이 나라 잃은 설움과 배고픔의 설움을 (겪으며) 위로받은 노래를 다시 되새겨 보고 싶었어요."(이미자)

일제 강점기에 나온 이애리수의 '황성옛터'를 비롯해 송민도의 '고향초', 이난영의 '다방의 푸른 꿈', 진방남의 '꽃마차' 등이 죽 이어지자 노년 관객들의 입은 절로 가사를 따라갔다. 유관순, 해방 당시 모습 등 암울한 시대를 투영한 빛바랜 사진들이 뒤로 흘렀다.

객석 환호가 가장 크게 울린 것은 역시 겹겹의 세월에도 생명력을 태운 이미자의 히트곡들이었다. 그가 기네스북에 등재될 당시인 1990년까지 발표한 음반만 총 560장, 2천69곡에 달한다.

1970년대 드라마 '아씨'와 '여로'의 동명 주제곡들, '황포돛배', '흑산도 아가씨' 등이 흑백 사진을 배경으로 불리자 객석에선 휘파람 소리와 '사랑합니다'란 외침이 터져 나왔다.

그의 히트곡 중엔 유독 여자를 위로하는 노래가 많았다.

김동건은 "'동백 아가씨', '여자의 일생', '흑산도 아가씨' 등 노래 주인공이 거의 여자"라며 "한 역사가 이뤄질 때 여성들, 어머니들의 힘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고 운을 띄웠다.

'여자의 일생'과 '기러기 아빠', '섬마을 선생님' 등의 무대에선 손을 머리 위로 올린 박수가 나왔다.

정점은 '동백 아가씨'였다. 애절한 오케스트라 연주를 따라 나오는 콧소리 섞인 첫 소절만으로도 향수를 안겼다.

'헤일 수 없이 수많은 밤을/ 내 가슴 도려내는 아픔에 겨워/ 얼마나 울었던가 동백 아가씨~'('동백 아가씨' 중)

현대사를 관통한 그 구성진 가락은 한반도를 넘어 이역만리 타국까지 잔향이 뻗어갔다. 이미자는 월남 파병군 위문 공연, 파독 광부와 간호사를 위한 독일 공연, 북녘 주민을 위한 평양 공연에서 마주친 그 눈빛이 선명하다고 했다.



앙코르곡은 이탈리아 가곡 '돌아오라 소렌토로'였다. 언뜻 예상밖 선곡이지만 그는 과거 세계 가곡 음반을 취입한 적이 있을 만큼 애창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날 게스트인 독일인 가수 로미나 알렉산드라 폴리노스도 의외의 출연자였다. 10여년 전 교환학생으로 한국에 왔다가 이미자 노래에 빠졌다는 독일 아가씨는 '삼백리 한려수도'를 또렷한 한국어 발음으로 들려줬다.

이미자는 영상 메시지를 통해 "어느덧 인생 끝자락에 와 있다"며 "돌아보면 많은 일이 있었다. 그때마다 저를 무대 위에 서 있게 해준 건 바로 여러분이었다"고 깊은 감사를 전했다.

영상에서도 그는 "60년이란 시간을…"이라며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했다. "영원히 기억되는 가수…이미자로 남겠다. 영원히 잊지 않겠다"고 눈물을 보였다.

이날 3천여 객석은 꽉 채워졌다. 시어머니와 친정어머니를 함께 모시고 온 40대 여성, 30대·60대· 80대 세 모녀 등 어버이날을 맞아 가족 단위 관객이 쉽게 눈에 띄었다. 지팡이를 짚거나 휠체어를 타고 온 고령 관객도 다수였다.

공연장 로비에서 엄마와 외할머니 사진을 찍어주던 30대 여성은 "두 분이 모두 좋아하는 공연을 보여드리게 돼 효도한 것 같다"고 뿌듯해했다.

이 공연은 10일까지 세종문화회관에서 이어진 뒤 군산 등 다른 지역으로 옮겨간다.



mimi@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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