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드러운 음식이 턱구조 바꿔 순치음도 가능해져
신석기 농경문화 정착 결과 /f/·/v/ 발음
(서울=연합뉴스) 엄남석 기자 = 신석기 시대 때 이뤄진 인류의 식습관 변화로 /f/나 /v/와 같은 순치음(脣齒音) 발음이 가능해졌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농경 문화가 정착해 부드러운 음식을 먹기 시작하면서 턱 구조가 바뀌어 아랫입술이 윗니에 닿을 때 나는 소리를 낼 수 있게 됐다는 것이다.
15일 스위스 취리히대학과 외신에 따르면 이 대학 언어학자 발타자르 비켈 교수가 이끄는 국제 학제 간 연구팀은 방대한 데이터 분석과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통해 얻은 이런 연구결과를 과학저널 '사이언스(Science)' 최신호에 밝혔다.
이 연구결과는 현대 인류가 발음할 수 있는 소리가 약 30만년 전 호모 사피엔스가 등장한 이후 바뀌지 않았다는 기존 이론과는 엇갈리는 것이다.
비켈 교수 연구팀은 미국 언어학자 찰스 호켓 박사가 1985년에 내놓은 이와 비슷한 연구 결과에서 영감을 받아 이번 연구를 시작했다.
호켓 박사는 당시 일부 수렵-채집 민족의 언어에서 /f/와 /v/ 발음이 아예 없거나 덜 사용하는 것은 농경문화가 확산하면서 가져온 식단의 변화에 따른 것일 수 있다는 추정을 내놓았지만 논리적 근거가 허술해 결국 주장을 철회했다.
비켈 연구팀은 고인류 화석 자료를 검토하고 다양한 세계 언어를 분석하는 한편 생체역학 컴퓨터 시뮬레이션 등을 통해 연구결과를 얻었다.
그 결과, 신석기 시대 이전 인간의 턱 구조는 위턱과 아래턱의 앞니가 맞물리는 겸자교합(鉗子咬合) 형태를 하고 있었다.
어렸을 때는 아래턱 앞니보다 위턱 앞니가 더 튀어나온 피개교합(被蓋·overbite) 상태지만 고기 등 딱딱한 음식을 섭취하면서 치아가 점차 마모돼 성인이 됐을 때는 겸자교합 형태가 된다. 이 상태에서는 아랫입술이 윗니에 닿을 때 나는 순치음 발음을 하기가 아무래도 더 어렵다고 한다.
그러나 농경문화가 도입돼 식량을 저장하고 음식을 조리할 수 있게 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귀리 등 곡식을 빻아 죽을 끓이고 스튜를 만드는 등 조리를 해 부드러운 음식을 먹게 되면서 치아 마모도 줄어들어 어린 시절의 피개교합형 턱 구조를 유지할 수 있게 됐으며, 현대인처럼 순치음을 발음할 수 있게 됐다는 것이다.
연구팀은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통해 피개교합 턱 구조로 순치음을 발음하는 것이 겸자교합보다 29%가량 더 쉽다는 것을 확인했다. 또 세계 주요 언어를 분석해 수렵-채집 사회 언어에서 순치음이 농경사회 언어의 4분의 1에 불과하다는 것도 밝혀냈다.
논문 제1 공동저자인 다미안 블라시 연구원은 인도-유럽어족 언어의 역사를 연구하면서 "순치음이 음식 처리 기술의 발전과 맥을 같이하며 청동기시대가 시작되기 얼마 전에 나타났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결론에 도달했다고 밝혔다.
비켈 교수는 고대 인도와 로마에서는 순치음 발음이 부드러운 음식을 먹고 부유하다는 것을 나타내는 신분의 상징이었을 수도 있다면서 인도-유럽어족에서는 순치음이 76%에서 나타나고 있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뉴욕타임스는 이번 연구결과와 관련, 많은 언어학자가 이치에 맞는 것으로 인정하지만 일부는 농업이 언어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결론이 과대평가됐다는 지적을 하고 있다고 전했다. 또 일각에서는 이번 연구결과가 자칫 인종차별적이나 자기민족중심주의적 견해를 되살리지나 않을까 우려하는 시각도 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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