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금주법은 페미니스트 운동의 산물"

입력 2019-02-27 17:54
"미국 금주법은 페미니스트 운동의 산물"

역사로 보는 술 이야기 '술에 취한 세계사'

(서울=연합뉴스) 이승우 기자 = 미국 1세대 갱 이노크 톰슨 일대기를 그린 HBO 명품 드라마 '보드워크 엠파이어'(Boardwalk Empire)는 1920년대에 중세풍 드레스를 입은 여성단체 회원들이 술의 해악을 규탄하며 정부에 금주 제도를 요구하는 장면들로 시작한다.

스티브 부셰미가 연기한 톰슨은 뉴저지주 해안 도시 애틀랜틱시티를 사실상 지배하는 밤의 황제이자 밀주업자다.

역설적으로 그는 여성들의 요구를 발판으로 금주법이 통과되자 밀주 제조와 함께 수입까지 병행하면서 더욱 큰 돈을 벌고 '전국구 갱'이자 현실 정치인으로 떠오른다.

이상주의자들의 목표가 상당수 현실에서 빗나가는 것처럼 금주법은 오히려 불법 거래되는 술 가격만 폭등시켰고, 블랙 마켓에서 술 소비가 계속되면서 밀주업자들 배만 불렸다.

이처럼 중세와 근대 암흑시대에서 벗어나 본격적으로 정치적 목소리를 키우던 미국 여성들은 의회를 통과하기 어려웠던 '금주법'이란 사상 초유의 규제 제도를 탄생시켰다.

영국 유명 블로거이자 에세이스트인 마크 포사이스도 저서 '술에 취한 세계사'(미래의 창 펴냄)에서 미국 금주법을 탄생시킨 금주 캠페인이 보수주의 또는 도덕 정치의 산물이 아니라 "페미니스트 운동이자 진보주의 운동"이라고 정의했다.

저자에 따르면 19세기 후반부터 시작된 금주 운동은 알코올 반대 캠페인이 아니라 '살룬(saloon)'을 몰아내는 게 목표였다.

남편이 살룬에 가서 번 돈을 모두 탕진하고 술에 취해 돌아와 아내를 구타한다는 인식이 팽배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여성들은 살룬이나 투표소에 들어갈 수 없었기 때문에 거리에서 시위하고 기도했다.

1873년엔 여성기독금주조합이 설립됐고 1890년대 들어서는 여성들의 권익과 연대를 주창하는 반살룬동맹이 창설됐다. 놀랍게도 동맹 회원들에겐 금주 서약이 없었다. 반대하는 대상이 술이 아니라 술에 취한 남성들이었고 추구하는 목표는 사실상 여성의 권리 실현이었다.



금주법으로 일컬어진 수정헌법 18조는 미국 헌법에서 유일하게 개인의 자유를 제한했으며, 유일하게 폐지된 수정헌법이기도 하다.

그러나 사실 금주법은 살룬과 폭력을 금하는 법이었으며, '만취를 유발하는' 술을 규제한 만큼 사실 위스키와 같은 증류주만 금지한 제도였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종교와 술에 얽힌 얘기도 흥미롭다. 많은 기독교 신자가 술을 마시지 않으며 술에 취하는 행위가 금기시된다.

그러나 저자는 성경이 술을 금한 적이 없다고 지적한다. 특히 구약 성경은 만취에 대해 관대한 입장을 취한다. 신약에서도 예수는 술을 제공하는 인물로 묘사된다. 무려 4.5ℓ나 되는 물을 포도주로 바꿔 대접하기도 한다. 심지어 "먹고 마시는 사람"으로도 묘사된다.

이는 그 유명한 최후의 만찬과도 관련 있다. 초기 기독교 주요 의식은 다 함께 술을 마시는 성찬식을 기반으로 이뤄졌다. 예수가 포도주를 마시고 사도들에게 술을 마시라고 명한 게 성찬식의 기원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이밖에도 예법으로 치장된 중국 고대 음주 문화, 청정 국가를 목표로 했으나 럼을 기반으로 발전한 오스트레일리아, 미국 서부 개척 시대 상징인 살룬 문화, 술과 담배에 매기는 세금에 경제를 의존하는 러시아까지 다양한 술 얘기가 펼쳐진다. 책을 다 읽고 나면 퇴근 후 소주 한 잔이 생각날지도 모른다.

서정아 옮김. 320쪽. 1만5천원.

lesli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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