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신속 3·1 운동] ② 日언론엔 '폭동'뿐…총독부 발표 '앵무새' 전달

입력 2019-02-14 14:00
수정 2019-02-15 14:41
[외신속 3·1 운동] ② 日언론엔 '폭동'뿐…총독부 발표 '앵무새' 전달

아시히·요미우리·마이니치 지면 직접 확인…반(反)조선 인식 확산 기여

수원 제암리 학살사건은 피해자를 가해자로 보도

아사히 "시대가 달라 과격한 표현…지금과 인식 다르다"





※ 편집자주 = "조선 독립 만세".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한반도 전역을 울렸던 이 함성은 '세계'를 향한 우리 민족의 하나 된 외침이었습니다. 한민족이 앞장서 '행동'함으로써 제국주의에 신음하던 아시아·아프리카 식민지의 각 민족을 자각시켜 함께 전 세계적 독립운동을 끌어가자는 외교적 호소였습니다. 강대국의 이권 다툼이 판치던 당시 국제질서는 1차 세계대전 승전국의 자격을 얻었던 일본 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기고만장하던 일본이 두려워한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바로 국제사회의 여론을 움직이는 외신 보도였습니다. 당시 일본은 3.1운동 초기 보도통제와 '프레임 조작'으로 관련 보도를 막는 데 그야말로 전력투구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의 문제이지, 진실을 감출 순 없었습니다. 독립운동의 산실이었던 중국 상하이(上海)로부터 시작해 미국 샌프란시스코, 뉴욕, 워싱턴 D.C.에 이어 영국 런던, 프랑스 파리, 이탈리아 로마, 러시아 모스크바, 브라질 상파울루, 싱가포르로 3·1운동 소식은 요원의 들불처럼 번져나갔습니다. 길지 않은 기사도 많았지만 이에 자극받은 각 식민지 국가에서는 앞다퉈 독립선언문이 나오면서 민족적 독립운동이 촉발됐습니다. 비록 한민족이 '자립'(自立)에는 실패했지만, 외신의 창(窓)을 통해 민족 자결과 독립에 대한 세계의 눈을 뜨게 만들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연합뉴스는 3·1 운동 100주년을 맞아 전 세계에 포진한 특파원망을 총동원해 당시 외신 보도들을 발굴해 시리즈로 보도합니다. 지금까지 3·1운동을 보도한 외신 일부가 부분적으로 소개된 적은 있지만, 세계 주요국 별로 보도된 내용을 종합적으로 발굴해 소개한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관련기사>

[외신속 3·1 운동] ① 그 날 그 함성…통제·조작의 '프레임' 뚫고 세계로 [http://www.yna.co.kr/view/AKR20190207090000009?input=1195m]

(도쿄=연합뉴스) 박세진 특파원 = "시대가 다르기 때문에 과격한 표현이 있습니다. 과거에 있었던 일과 지금의 아사히신문 인식과 다르다는 점을 이해해 주기 바랍니다."

일본 아사히(朝日)신문 관계자는 1919년 3·1 운동 당시의 보도 내용을 알고 싶다는 의향을 전달한 연합뉴스에 먼저 양해를 구했다. 그러고는 3·1운동이 일어난 뒤 수 일간은 규제 때문에 제대로 보도할 수 없었던 것으로 안다며 그해 9월 11일까지의 관련 기사 목록 30여 건을 건네줬다.

이를 실마리 삼아 아사히뿐만 아니라 1919년 당시에도 일본의 유력 매체였던 요미우리(讀賣), 마이니치(每日) 등의 지면을 직접 확인했다.

눈에 익지 않은 자체(字體)에 일본인에게조차 생소한 단어가 적지 않았지만 아사히신문 관계자가 왜 그런 태도를 보였는지 금방 알 수 있었다.



1919년 3월 1일.

서울, 평양, 의주, 선천, 안주, 원산, 진남포 등 전국의 6개 도시에서 요원(燎原)의 불길처럼 독립 만세운동이 시작됐다.

이튿날부터 만세운동은 평안도, 함경도, 황해도의 주요 도시로 확산했고, 3월 3일에는 고종 장례식을 보기 위해 서울로 왔던 지방 사람들이 시위에 동참하기도 했다.

비폭력 저항으로 시작된 3·1 운동은 이후 방방곡곡으로 퍼져나가 국권을 침탈한 일제에 당당하게 맞서는 독립운동으로 발전했다.

일제 통계로만 봐도 3개월간의 시위 진압 과정에서 7천509명이 죽고, 4만6천948명이 구금됐다고 하니 3·1 운동이 얼마나 광범위하게 펼쳐졌고, 일제가 얼마나 가혹하게 탄압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시 일제 언론은 말 그대로 '앵무새'에 불과했다. 일제 정부(총독부 등)가 침묵하라고 하면 그대로 입을 다물고, 받아쓰라면 받아 썼다.

아사히신문을 보면 3월 3일 자에 고종의 장례식 사진과 함께 3·1 운동 관련 소식이 처음 등장하는데, 기사 제목은 '야소교도(기독교도) 조선인의 폭동'이었다.

이어 3월 7일 자는 주(主) 제목을 '조선 각지의 폭동'으로 바꾸고 진남포에서 소요 사태가 있었다는 기사를 실어 3·1 운동이 급속히 확산했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할 뿐이다.

요미우리는 3월 7일 자에서 '조선에 넘쳐나는 학생 소동(騷動) 중대(重大)'라는 제목으로 고종 장례식에 맞춰 1만900명의 학생이 학업을 폐하고 노래 부르며 줄지어 행진했다고 전했지만, 그 후로는 3월 내내 눈에 띄는 기사가 거의 없었다.



마이니치의 전신인 도쿄니치니치(日日)는 3월 3일 자에서 '조선 경성의 불온(不穩)'이란 제목으로 군중들이 대한문에 모인다는 사실을 전하면서 총독부가 유언비어에 현혹되지 말라는 글을 관보에 게재했다고 전했다.

3월 7일 자에서 전국의 시위 상황을 보도했지만 시위 참여자를 '폭도'로 규정했다.

일본인들로 구성된 공익법인인 '고라이(高麗) 박물관'은 '일본 신문이 3·1 운동을 어떻게 전했는가'라는 반성문 성격의 자료를 최근 내놓았다.

이 자료에 따르면 3·1 운동이 일어났을 때 조선에서는 총독부가 제정한 조례에 따라 신문, 서적, 잡지를 발행하는 자유가 없었다.

독립운동 상황을 알리는 방법으로는 지하출판물밖에 없었는데, 이를 소지했다가 적발되면 처벌 대상이 됐다.

일본 내에서는 총독부 발표가 그대로 보도돼 조선에서 일어난 사실이 왜곡 전파됐다.

언론 매체들은 총독부 경찰의 발표 내용을 비판 없이 기사화했고, 일본인은 그대로 받아들여 반(反)조선 인식이 퍼지게 됐다고 한다.

이런 사실은 일제 군인들이 수원 제암리 주민 30여명을 학살한 사건에 대한 총독부 기관지 경성일보(1919년 4월 17일 자) 보도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 사건은 1919년 4월 15일 아리타 도시오(有田俊夫) 일본 육군 중위가 이끄는 군경이 만세운동이 일어났던 제암리에서 주민 약 30명을 교회에 모이게 한 뒤 학살하고 증거를 인멸하기 위해 불까지 질렀다는 것이 역사적 사실이다.

그러나 경성일보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폭력 상황을 어찌할 것인가'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주민들이 주재소와 상점을 습격하고 경찰관 2명을 잔인하게 죽였다"며 피해자를 가해자로 둔갑시키고 일본 군인들의 만행을 은폐한 채 사실을 왜곡해 전했다.

도쿄 소재 조선문제연구센터가 소장한 '박경식의 조선 3.1 독립운동(1987)' 자료에도 일본 신문의 왜곡 보도 실태가 잘 기술돼 있다.

이 자료에 따르면 3·1 운동 당시 일본 신문은 일부 소수의 천도교도와 기독교도의 음모, 외국인 선교사의 선동에 의한 폭동이라는 프레임으로 전했다.

조선 민중을 '폭도' '범인'으로 칭하고 독립봉기를 '폭민의 경찰서 습격' '헌병 참살' '순사학살' '내지인(일본인) 상점에 폭행' '아무런 관계없는 내지인 남녀까지 살해' 등의 제목으로 보도하며 일본인 피해를 과장되게 선전하고 조선인의 독립운동을 비난했다.

또 1919년 3월 15일쯤부터 보도통제가 이뤄져 관련 기사는 사라지고 논평이 주가 됐다.

논평의 취지는 민족자결주의를 부정하고 무력진압의 적극적인 지지를 표명하는 것이었다.

4월 15일의 제암리 학살사건을 시작으로 수많은 학살 사건에 관해 일본 신문은 어떠한 보도도 하지 않았다.

일제 당국에 대한 책임 추궁 문제를 언급하지 않은 것은 물론이다.



(취재 보조:데라사키 유카 통신원)

parksj@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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