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봐도 유죄인 사건의 판결이 무죄라면…'합리적 의심'

입력 2019-02-14 06:01
누가 봐도 유죄인 사건의 판결이 무죄라면…'합리적 의심'

판사 출신 작가 도진기의 첫 법정물…'산낙지 살인사건' 모티프



(서울=연합뉴스) 김은경 기자 = 20대 초반 남성이 연상인 여자친구와 모텔에 투숙했다가 술에 취한 채 큰 젤리를 먹고 기도가 막혀 죽었다고 한다.

이후 여자친구가 거액의 사망 보험금을 받았고 다른 남자들과도 교제 중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수사가 시작된다.

재판을 맡게 된 부장판사 '나'(현민우)는 여자친구의 범행을 확신하지만, 주심 판사인 민지욱은 '합리적 의심 없는 입증의 원칙'을 내세우며 그것이 억측일 수 있다고 나의 주장을 반박한다.

합의 결과 2대 1로 '무죄'라 정해진 판결문을 들고 '나'는 선고를 하러 법정으로 향한다.

20여년 간의 판사 생활을 끝내고 변호사가 된 작가 도진기가 처음으로 본격 법정물 '합리적 의심'(비채)을 출간했다.

이 책은 그가 판사였던 3, 4년 전에 완성됐지만, 공직을 떠나고 나서야 비로소 세상에 나오게 됐다.

'합리적 의심'의 '젤리 살인사건'은 한때 '산낙지 살인사건'으로 세간이 알려졌던 실제 사건을 모티프로 한다.

실제 사건을 연상시키는 만큼 출간까지 쉽지 않았고, 부담도 컸지만 도 작가는 "실체의 진실에 대해 대중이 더 고민하게 하고 싶었다"고 강조했다.

산낙지 살인사건은 대법원에서 무죄로 확정됐다. 하지만 이것이 정말 피고인이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다는 뜻일까.

"판결에 승복하라는 것은 우리나라 시스템상 사법부에서 내린 결론을 최종으로 하자는 약속을 따르라는 것이지 그것을 진실로 받아들이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실제로 그 사람이 죄를 저지르지 않았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는 거죠. 왜 대중이 정의로 믿는 것과 판결이 괴리가 있는지, 왜 판사가 그런 판결을 내리게 됐고 그 과정에 어떤 이야기가 숨어있는지 그 얘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대부분 판사는 범죄자를 완벽하게 잡는 것보다 억울한 사람을 만들지 않는 것을 선호한다.

100명 중 99명의 도둑, 1명의 선인이 있다면 100명 모두 처벌하기보다 90명을 처벌하고 10명을 처벌하지 않는 것을 택한다.

억울한 사람이 나오지 않도록, 피고인이 범인이 아닐 수 있다는 '합리적 의심'이 존재한다면 유죄를 선고할 수 없다는 '합리적 의심 없는 입증의 원칙'은 판결의 매우 중요한 잣대다.

사회에서도 법과 절차에 따라 처벌하는 것을 원하고, 그런 측면에서 보면 개인의 정의라는 판단을 따른 현민우는 일반적으로 기대하는 좋은 판사는 아니다.

도 작가는 "법에 따른 결론과 상식 및 정의에 따른 결론이 항상 일치하지는 않는다"며 "판사는 직업인이지만 한편으로는 일반 시민이기도 하니 그런 갈등을 늘 겪는다"고 설명했다.



'법은 정의를 위한 것이 아니며, 판사 역시 정의의 수호자가 아니다'라는 표지 문구부터 파격적인 결말까지, 이 소설은 폐쇄적인 사법 체계에 대한 일종의 도전과도 같다.

도 작가 또한 "실제 있던 재판을 모티프로 하니 이미 판결이 난 사건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이냐, 혹은 재판한 판사를 공격하는 것이냐는 등의 오해를 살 수 있고, 법원 내부 얘기도 많아 부담됐다"고 우려했다.

하지만 이번 소설은 사건의 실체를 보여주는 다큐멘터리가 아니고, 사건에 대한 것은 모두 상상력에 기반한 '픽션'이라고 그는 강조한다.

"법적 결론이 대중이 원하는 바와 다르게 나는 것을 보며 독자들에게 '당신이 생각하는 판사라면 어떻게 판결했으면 좋겠는가' 하고 물어보고 싶었어요. 겉만 보고 이 나쁜 놈이 풀려났네, 혹은 판결을 잘 했네, 못 했네 하는 것이 아니라 좀 더 깊이 생각할 수 있도록 자세히 풀어낸 거죠."

다만 합의부가 판결에 도달하는 과정이나 법원 구조 및 질서에 관한 내용 등은 최대한 사실에 근접하게 썼다.

도 작가는 "대중들이 실제 재판이 어떻게 이뤄지는지 알 수 있도록 배경 부분은 솔직하게 썼다"며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대중이 법 시스템을 좀 더 가깝게 느끼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고 바랐다.

주로 추리소설을 써온 그는 좀 더 자유로운 변호사 신분으로 추리소설을 다시 쓸 계획이라고 전했다.

"뉴스에 나오는 사건들은 다 눈여겨보면서 법원에 신청해 판결문도 읽어보는 등 아이템을 매번 고민합니다. 법원을 나와 변호사로 살아보니 조금은 다른 시각이 생긴 것 같아 이전과는 좀 다른 얘기도 한번 써보고 싶네요."

bookmania@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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