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NS 세상] 수면 위로 떠오른 '아동학대 녹음' 논란

입력 2019-02-01 06:00
[SNS 세상] 수면 위로 떠오른 '아동학대 녹음' 논란

법원, 최근 아동학대 사건서 녹음 증거능력 인정

(서울=연합뉴스) 독자팀 = "그러니까 네가 그렇게 미움받는 거야", "너 때문에 감기 옮았잖아. 약을 왜 제때 안 먹고 누런 코 나와가지고는 여기저기 전파하고 다녀?"

서울 서초구 내곡동에 거주하는 D(44)씨는 녹음기에 담긴 내용을 듣고 마음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어린이집에 다니는 딸(당시 28개월)이 집에 오면 방바닥에 엎드려 일어나지 않거나 이유 없이 상대방을 째려보는 등 이상한 행동을 하자 '혹시나' 하는 마음에 아이 가방에 녹음기를 넣어 등원시킨 후였다.

D씨는 딸을 어린이집에서 퇴소시킨 데 이어 소아정신과 상담을 받게 했고, 급기야 어린이집 관계자를 경찰에 고소하고 관할 구청에 신고했다.



어린이집 원장과 해당 교사의 개인적 사과를 받긴 했지만 근본적 대처나 재발 방지를 원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수사ㆍ행정 기관에서 속 시원한 이야기를 들을 수는 없었다. 아이가 어린이집 교사의 폭언을 들었다는 주장을 입증할 주요 단서는 녹음 파일인데 현행법상 녹음은 증거능력이 인정되지 않기 때문. 통신비밀보호법(통비법) 제3조는 '공개되지 않은 타인간의 대화를 녹음 또는 청취하지 못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답답해진 D씨는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글을 올려 어린이집 CCTV 음성 녹음을 법제화하고 증거능력으로 인정해달라고 호소했다. "자신의 의사를 확실히 표현하지 못해 폭언 등의 학대를 당해도 부모에게 알리기 어려운 36개월령 이하 아이들이 다니는 보육시설에서만이라도 녹음이 의무화돼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 아동학대 범죄에서 녹음의 증거능력

D씨처럼 아이가 어린이집 등 보육기관에서 언어 학대를 당하는 것 아닌가 의심하는 양육자들이 아이들이 등원할 때 옷깃이나 인형 등에 초소형 녹음기를 숨겨 보내는 경우가 있다.

지금까지 녹음은 학대 정황을 파악하는 데 도움을 줄 뿐 학대 혐의를 입증하기 위한 증거로는 무용지물이었다.

그런데 앞으로는 보육 당사자가 '입조심'에 더 신경을 써야 할 것으로 보인다. 법원이 최근 아동학대에서 녹음을 증거로 인정하지 않은 1심을 뒤집고 항소심에서 유죄를 선고했기 때문이다.



1일 한국여성변호사회에 따르면 대구지법 형사항소1부(임범석 부장판사)는 아동학대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A씨에게 1심의 무죄 판결을 깨고 벌금 300만원과 40시간의 아동학대 치료 프로그램 수강 명령을 선고했다.

A씨는 자신이 돌보던 생후 10개월 아이에게 욕설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아이 엄마가 집에 설치해 둔 녹음기에 돌보미의 욕설이 그대로 담겨있었다.

1심 재판부는 아이 엄마가 몰래 녹음한 자료는 위법한 증거라며 A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돌보미가 아이에게 한 말은 통비법이 보호하는 타인 간의 '대화'에 해당하고, 이를 몰래 녹음했으니 증거능력을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2심 재판부는 ▲ 피고인이 피해 아동을 상대로 하는 말은 타인 간 '대화'에 해당한다고 보기 어렵고 ▲ 아동학대 범죄에 대한 실체적 진실 발견이라는 공익적 요구와 비교할 때 이 사건의 녹음이 피고인의 인격권을 현저하게 침해하지 않고 ▲ 피해 아동을 돌보는 공간이 사적인 영역에 해당한다고 보기 어렵다는 이유를 들어 1심 판단을 뒤집었다.

◇ "폭언으로부터 아동 보호할 장치" vs "인권 침해"

여성변호사회는 "이번 판결은 실체적 진실에 대한 끊임없는 탐구와 적극적인 법 해석을 통해 아동 권리 보호를 실질화한 것"이라며 "아동이 사각지대에서 학대·방치되는 일을 최소화할 수 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는 판결"이라고 환영했다.

여성변호사회 사무차장인 이상희 변호사는 서초구의 D씨 사례에 대해서도 "녹음 내용이 증거로 인정될지 다퉈볼 여지가 있다"고 말했다. 대구지법 항소심 판결로 D씨 딸이 어린이집에서 겪은 일에 대해 녹음을 증거로 해 법적 책임을 물을 가능성이 열렸다는 소리다.

사립유치원 문제 등 양육 문제에 대해 의견을 내온 '정치하는엄마들'의 장하나 공동대표(전 국회의원)는 "현재의 과도한 교사 1인당 보육 아동 비율을 줄이거나 교사 자격을 강화하는 등의 근본적 대책이 우선되지 않는 한 녹음을 아동학대의 근본적 대책으로 보진 않는다"면서 "그러나 폭언도 분명한 폭력인 만큼 가해자 처벌 책으로 유용한 수단이 될 수는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반면 녹음이 어린이집 종사자들의 인권을 침해하고 노동 환경을 열악하게 수단이 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광주의 한 어린이집 원장 B씨는 "어린이집을 운영하며 느끼는 것은 '믿음'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라며 "누군가 종일 내가 행동하고 말하는 것을 감시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어떻게 기쁜 마음으로 아이들을 볼 수 있겠나"라고 말했다.

csm@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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