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판기록 통째로 증발했다" 中 최고법원 내부고발 '일파만파'

입력 2019-01-22 11:35
"재판기록 통째로 증발했다" 中 최고법원 내부고발 '일파만파'

탄광개발권 관련 민사소송, 법원 따라 판결 뒤집혀

사법부 수장·당 고위층 관여 의혹 확산

(서울=연합뉴스) 이해영 기자 = 중국 최고인민법원에서 특정 민사재판에 관한 기록이 통째로 사라졌다는 담당 판사의 내부고발이 나와 큰 파문이 일고 있다.최고법원의 재판기록 증발이라는 전대미문의 스캔들에는 사법부 수장인 최고인민법원장이나 공산당 상층부가 관여했을 거라는 의혹까지 제기되는 사태로 번지고 있다.

"최고법원에 도둑이 있단 말인가?"

22일 아사히(朝日)신문에 따르면 사태의 발단은 중국 국영중앙(CC) TV 인기 아나운서 출신인 추이융위안(崔永元)이 작년 말 SNS에 올린 이 한마디였다. 산시(陝西)성에 있는 탄광개발권을 놓고 최고법원에서 이뤄진 소송기록이 심리중에 없어졌다는 소문이 삽시간에 확산했다.

추이융위안은 2천만명에 가까운 팔로워를 거느리고 있는 파워 블로거다. 작년에 유명 배우 판빙빙(范氷氷)의 탈세의혹을 폭로한 당사자로 내부고발자들의 '피난처' 역할을 하고 있다.



문제의 재판은 2017년말 종료됐다. 최고법원은 언론에 "기록이 모두 보관돼 있다"며 증발설을 부인했지만 추이의 계속되는 폭로에 견디지 못하고 이틀 후 "조사를 개시한다"고 말을 바꿨다.

이후 최고법원에서 해당 소송을 담당했던 왕린칭(王林?)판사가 셀프촬영한 동영상을 인터넷에 올리자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왕 판사는 동영상에서 기록이 사라진 2016년 11월 상황을 설명하면서 상사에게 즉시 보고하고 법원 CCTV를 조사할 것을 요구했으나 2대 모두 파손됐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폭로했다. 왕 판사 자신도 추이 전 아나운서와 연락을 했다.

올들어 1월8일 공산당 중앙정법위원회의 지휘로 국가감찰위원회와 최고인민검찰(대검), 공안부 합동조사팀이 조사에 나섰다.

사라진 기록에는 법원 상사의 지시와 관계 당국의 의견도 기록돼 있는 것으로 알려져 의도적으로 반출됐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왕 판사는 "상사로부터 사건을 하급법원으로 돌려 보내라는 지시를 받을 때 저우창(周?) 최고인민법원장의 뜻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고도 증언했다. 추이전 아나운서도 2015년 부패혐의로 실각한 법원 부원장이 "저우창 원장의 지시에 따라 이 건은 철저히 비밀에 부친다"는 내용을 적어 놓았다며 기록을 공개했다. 인터넷에서는 재판에 관여한 의혹으로 저우창 원장이 경질될 것이라는 정보가 나돌고 있다.

중국에서는 정치의 사법개입이 문제가 돼 왔다. 시진핑(習近平) 정부는 사법부 독립을 "서양의 잘못된 사상"이라고 거부하면서도 사법부에 대한 신뢰를 얻기위해 '의법치국(법에 따른 통치)'을 내걸고 "인민이 공평하고 정의롭다고 느끼도록 노력한다"고 선전해 왔다.

그런 와중에 최고법원이 관련된 이번 스캔들이 터지자 최고법원 판사 조차 법에 의지할 수 없어 내부고발을 할 수 밖에 없었다는 인식이 확산하고 있다.

인터넷에서는 "이게 현실"이라며 절망감을 호소하는 글이 넘쳐나고 있다.

당의 한 관계자는 "발각되면 큰 소동이 벌어질 일을 최고법원 원장이 간단히 저질렀을 거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더 높은 곳의 개입을 감추는 등 다른 목적이 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저우창 원장은 시 주석이 "엘리트화 했다"고 비판한 공산주의청년단(공청단) 최고 책임자를 지냈으면서도 요직에 남아 있는 몇 안되는 간부 중 한명이다. 이번 스캔들을 "공청단 탄압"에 이용하고 있다는 견해도 있다.

거액의 이권이 걸린 문제의 민사재판 판결은 법원마다 판단이 뒤바뀌었다. 2개의 기업이 다툰 소송에서 각각의 후견역할을 하는 고위 관리의 정치투쟁이 얽혀있다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이번 소송의 무대는 석탄산지로 유명한 산시성 위린(楡林)이다.

중국 언론에 따르면 현지 민간기업이 2003년 8월 새로 광맥개발권을 취득해 비용과 이익을 8대2로 배분하기로 성 정부계 기업과 계약했다. 광산은 매장량이 20억t으로 추정됐다. 당시에는 석탄가가 고공행진을 계속하던 때라 60조원 이상의 이권이 걸린 사업이었다.

그런데 성 정부가 10월에 돌연 탄광개발권을 정부 결정사항으로 하는 새로운 규정을 제정했다. 정부계 기업이 2006년4월 다른 홍콩기업과 다시 계약을 하면서 "2003년 계약은 무효"라고 주장했다.

현지 기업은 이에 반발, 다음달 계약위반을 주장하면서 제소, 1심에서 승소했다. 그러나 2심인 최고법원은 2009년 심리불충분을 이유로 사건을 1심법원으로 되돌려 보냈다.

2번째 1심에서는 현지 기업이 역전패소했다. 더욱이 경찰이 현지 기업 경영자를 허위등기혐의로 구속했다. 이후 무죄를 선고받은 경영자가 재차 상급법원에 상소해 2017년12월 현지 기업이 최고법원에서 승소했다.

사건을 하급법원으로 되돌려 보내기 전인 2008년 최고법원 부원장이 성 정부 고위 관리를 불러 협의한 후 성 정부가 최고법원에 의견서를 보냈다는 의혹도 불거졌다.

의견서에는 "1심판결을 유지하면 중대한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기록돼 있어 성 정부가 최고법원에 압력을 행사했다는 의심을 받고 있다.

현지기업 보다 나중에 개발권을 취득한 홍콩기업 경영자는 성 정부에서 근무한 경력의 소유자다. 그의 부친과 당시 남편도 현지 당간부였던 것으로 알려져 홍콩에서 축적한 재력과 고위 간부들과의 관계를 이용했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다만 지방정부가 최고법원을 복종시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라서 중앙의 고위 간부가 관여했을 거라는 소문이 나돌고 있다.

재판이 계속되던 시기에 산시성 성장 등을 지낸 자오정융(趙正永)에 대해서는 지난 15일 "중대한 규율위반혐의로 조사하고 있다"는 발표가 나왔으나 이번 사건과의 관계는 아직 알려지지 않았다.

lhy5018@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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