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 주택부지서 고려 중성 방어시설 치(雉) 첫 발견(종합)

입력 2018-12-06 10:02
수정 2018-12-06 16:10
강화 주택부지서 고려 중성 방어시설 치(雉) 첫 발견(종합)

목책 구덩이 9기 조성 뒤 인위적 매립…물 없는 도랑 해자도 확인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강화 고려궁지에서 북동쪽으로 약 2㎞ 떨어진 옥림리 주택부지에서 고려시대에 조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성벽 방어시설 중 하나인 치(雉)가 발견됐다.

매장문화재 조사기관인 한백문화재연구원(원장 서영일)은 소규모 국비지원 발굴조사 지역인 강화 옥창돈대 인근 옥림리 부지에서 강화 중성(中城)에 맞닿아 축조한 목책 치와 성벽 바깥쪽에 판 물 없는 도랑인 외황(外隍) 유적을 확인했다고 6일 밝혔다.

치는 성벽 일부를 바깥으로 돌출시킨 방어용 구조물을 뜻한다. 황(隍)은 해자 중에서도 물채움을 하지 않는 방어시설을 의미하며, 성벽을 기준으로 위치가 안이냐 밖이냐에 따라 내황(內隍)과 외황으로 나뉜다.

고려는 몽골 침입을 피해 1232년 강화로 천도한 뒤 1270년까지 머물렀다. 왕실은 방어를 위해 궁궐 바깥에 내성(內城), 중성, 외성(外城)을 쌓았다.

강화군 향토유적 제2호인 중성은 흙을 다져 올린 8.1㎞ 길이 토성으로, 강화중성에서 치와 외황 유적이 드러나기는 처음이다. 조사 지역은 강화중성에서 북쪽으로 25m 거리에 있으며, 서해에서 서울로 들어오는 배를 조망하기에 좋은 능선에 위치한다.



이번 조사에서는 등고선과 평행하게 판 목책 구덩이 9기로 이뤄진 치와 함께 두 겹으로 두른 외황, 초소가 나타났다.

지름이 130∼190㎝에 달하는 구덩이는 원형 혹은 타원형이며, 간격은 170∼300㎝이다.

목책 구덩이는 능선을 따라 한 줄을 이뤘는데, 축조 이후 나무 기둥을 뽑아내기 위해 인위적으로 구덩이를 파낸 뒤 흙으로 메운 것으로 조사됐다.

'고려사절요' 고종 46년(1259) 6월 기록에 따르면 몽골은 고려와 종전을 위한 강화협정을 맺으면서 강화도성을 허물라는 조건을 내세웠고, 이후 몽골 관리가 성벽을 파괴하는 과정을 감시했다.

연구원 관계자는 "문헌 기록처럼 강화중성 일부인 목책을 인위적으로 허물고 메운 흔적이 고고학적으로 확인됐다"고 강조했다.

외황은 풍화암반층을 L자형으로 판 뒤 바깥쪽을 돌과 흙을 다져 올린 유적과 U자형으로 파내고 흙을 바깥에 쌓아 올린 유적 두 개가 차례로 드러났다.

치와 가까운 외황은 너비 260∼350㎝·높이 150∼220㎝이며, 바깥쪽 외황은 너비 390∼410㎝·높이 90∼100㎝로 파악됐다.

조사 지역에서는 신라 토기를 버린 폐기장도 확인돼 신라시대부터 군사 목적 방어시설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연구원은 추정했다.

연구원 관계자는 "이번 조사에서 나온 치와 외황은 강화중성 성벽 구조와 형태를 규명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며 "고려 도성 보존과 정비를 위한 새로운 자료를 축적했다는 데에도 의미가 있다"고 설명했다.



psh59@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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