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인사 고려목판·희랑대사상, 산문 나와 서울로 떠나다
법보전서 고불식…국립중앙박물관 전시 위해 11점 이운
(합천=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겨울을 재촉하는 가을비가 밤사이 그친 9일 오전, 법보종찰(法寶宗刹)인 합천 해인사 법보전(法寶殿)에 가사를 걸친 스님 30여 명이 모였다.
본존을 모신 대적광전 뒤편 높은 곳에 지은 법보전은 국보 제52호 장경판전 일부로, 나란히 배치된 수다라장과 함께 팔만대장경판을 보관하는 건물이다.
이날 법보전에서는 국립중앙박물관이 고려 건국 1천100주년을 맞아 내달 4일 개막하는 특별전 '대고려, 그 찬란한 도전'에 선보일 고려목판 4점이 해인사를 떠나 서울로 향함을 부처에게 알리는 고불식(告佛式)이 열렸다.
서울로 옮기는 목판은 국보 제206호인 '대방광불화엄경 변상도 주본', 보물 제734호인 '역대연표'와 '예수시왕생칠경 변상도', 1098년 판각해 920년 역사를 지닌 '대방광불화엄경 수창년간판'이다.
이 목판들은 팔만대장경판으로 알려진 국보 제32호 대장경판은 아니지만, 고려문화의 정수를 보여주는 귀중한 유물로 평가된다.
법보전 앞에 마련한 단에 배, 귤, 감, 사과, 바나나, 수박과 떡을 올려놓고 진행한 고불식은 해인사 주지 향적 스님이 배기동 국립중앙박물관장에게 고려목판 복제본을 전달하고 연(輦·가마)에 싣는 의식으로 시작됐다.
경성 스님은 "장경판전에 봉안된 고려목판 중 대방광불화엄경 변상도 주본을 비롯한 4점을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이운(移運)한다"며 "삼보님과 천룡들께서는 이운 과정과 전시 동안 옹호해 특별전이 성공적으로 개최되도록 가피하소서"라고 기원했다.
이어 향적 스님은 "대장경과 고려목판은 양과 질 면에서 세계에 하나밖에 없는 문화재"라며 "국민들이 전시에서 고려목판을 보고 긍지와 자부심을 갖기 바란다"고 말했다.
배 관장은 "불교를 통한 구국과 최고 수준의 문화가 고려정신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며 "고대 삼국과 조선보다 소홀히 대한 고려를 재조명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문재인 대통령이 남북이 합쳐서 고려전을 개최한다고 언급한 만큼 왕건상과 북한 문화재가 오기를 학수고대한다"고 덧붙였다.
이어 색색의 깃발과 노란색 술이 달린 붉은 산(傘)을 든 스님들이 앞장서고 연을 붙잡은 사람들이 뒤따르는 행렬이 법보전부터 사찰 입구인 일주문까지 펼쳐졌다.
고려목판의 서울행에는 고려를 건국한 왕건 스승인 희랑대사 모습을 사실적으로 표현한 건칠희랑대사좌상(보물 제999호)과 대적광전 비로자나불 복장유물(보물 제1779호), 대적광전 비로자나불 복장전적(보물 제1780호) 등 해인사의 다른 유물 7점도 함께했다.
해인사 암자인 희랑대에 있다가 구광루(九光樓)를 거쳐 2000년대부터 성보박물관 수장고에 있던 희랑대사좌상은 대고려전을 위해 해인사 산문을 처음으로 나섰다.
희랑대사좌상은 930년 무렵 완성한 것으로 추정되며, 앞쪽은 건칠(乾漆·여러 겹 삼베를 바르고 옻칠하는 방식) 기법으로 만들었고 뒤쪽은 나무로 제작했다. 얼굴이 길고 이마에 주름살이 있으며, 우뚝 선 콧날과 잔잔한 미소가 특징이다.
향적 스님은 "희랑대사는 열반하기 전에 자신의 조각상을 만들도록 했다"며 "불교미술사에서 전무후무한 작품으로 이번 전시를 통해 큰 관심을 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박물관 측도 이번 특별전이 희랑대사좌상 진품을 볼 드문 기회라고 전했다.
무진동 차량에 실린 해인사 유물들은 곧장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이동했다.
박물관은 고불식에 이어 10일 오전 경기도 연천 숭의전지(사적 제223호)에서 희랑대사좌상 복제품과 왕건 초상화가 만나는 장면을 연출하는 문화 행사를 개최한다. 숭의전(崇義殿)은 고려 태조, 현종, 문종, 원종과 충신 16명의 위패를 모신 곳이다.
이어 오후에는 국립중앙박물관 정문부터 열린마당까지 취타대와 전통 의장대 안내를 받으며 대장경판과 희랑대사좌상을 옮기는 영접 의식을 진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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