在伊 조각가 박은선 "한국인 정체성이 타국서 인정받은 원동력"
'조각 성지' 피에트라산타 시가 주는 '프라텔리 로셀리'상 수상
"눈 뜨면 작업실로 가는 일상을 최대한 오래 지속하는 게 작은 소망"
(피에트라산타[이탈리아]=연합뉴스) 현윤경 특파원 = "지금도 아침마다 돌을 만나기 위해 작업실로 향하는 길에 설렘이 느껴집니다. 큰 목표는 따로 세우지 않았고, 매일 매일 작업실에 나가는 이런 일상을 최대한 오랫동안 이어가는 게 작은 소망입니다."
세계적인 '조각 성지'로 꼽히는 이탈리아 중부 해안도시 피에트라산타에 둥지를 틀고, 25년째 작품활동을 하고 있는 박은선(53) 조각가가 피에트라산타 시가 매년 최고의 조각가를 뽑아 수여하는 '프라텔리 로셀리' 상을 타며 거장으로 인정받았다.
이탈리아어로 '성스러운 돌'을 의미하는 피에트라산타 시는 매년 도시의 명성을 빛낸 조각가에게 주는 '프라텔리 로셀리' 상의 제28회 수상자로 박은선 씨를 선정해 28일 시내 중심가의 유서깊은 산타고스티노 예배당에서 시상식을 개최했다.
한국인 최초의 수상자인 박 작가는 이로써 1991년 제1회 상을 탄 페르난도 보테로, 2회 수상자인 폴란드 조각가 이고르 미토라이 등 세계적 조각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됐다.
박 작가를 수상 직후 만나 그동안의 조각 인생과 앞으로의 계획 등을 들어봤다.그는 "25년 전 처음 이곳에 왔을 때 품었던 '나도 언젠가는 이런 상을 탈 수 있지 않을까'하는 막연한 기대감이 현실이 돼 감개무량하다"며 더 정진하라는 뜻으로 알고, 평소와 마찬가지로 하루 하루 돌을 어루만지는 일을 계속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최근 유럽을 중심으로 주가가 급상승한 그는 "오랫동안 타국에서 활동하고 있지만, 한국인임을 잊어본 적이 한시도 없다.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오히려 드러내려 노력해 왔다"며 "작품에 자연스럽게 반영돼 있는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이 이곳에서 특별한 관심과 인정을 받는 원동력이 된 것 같다"고 강조했다.
박 조각가는 피에트라산타에서 생산되는 대리석과 화강석을 이용해 한국적인 곡선과 조형미가 살아있는 독특한 작품 세계를 일구며 주목을 받아왔다.
4반세기 동안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피에트라산타 시내의 작업실과 자택을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오가며 작업에만 몰두하는 구도자적인 단순한 삶을 이어온 그는 향후 목표를 묻자 "요즘 들어 많은 사람들이 앞으로의 목표를 묻는데, 제 바람은 간명하다"며 "눈을 뜨면 매일 매일 작업실로 향해 돌을 만지는 일상을 최대한 오랫동안 계속하는 것"이라고 소박한 바람을 밝혔다.
다음은 박 작가와의 일문일답.
-- 전 세계 거장들이 작업을 위해 몰리는 피에트라산타에서 현대 조각 거장들을 엄선해 주는 상으로 잘 알려진 상을 타게 된 소감은.
▲ 이곳에 처음 왔을 때 언젠가는 이 상을 타면 좋겠다는 소망을 막연히 품었었다. 꿈이 현실이 된 셈이다. 존경하는 현대 조각의 거장들이 거쳐간 상을 받게 돼 더할 수 없는 영광이다. 더 열심히 작품 활동을 하라는 뜻으로 알고, 정진하겠다.
-- 동양인이 거의 없는 이곳에서 예술가로 인정받기가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
▲ 처음에 여기 왔을 때는 동양인도 거의 없을 뿐 아니라, 한국이라는 나라를 아는 사람도 드물었다. 하지만, 묵묵히 좋아하는 일을 하고, 이웃들과 어울리다 보니 이제는 이곳이 제2의 고향이나 다름없다. 그동안 크고 작은 작품 수천 점을 만들며 이곳에서 구입한 대리석의 양만 해도 엄청나다. 예술활동을 했지만, 나름대로는 지역 경제에도 기여한 일이 됐다. 피에트라산타 시에서도 그런 점을 높이 평가해준 게 아닌가 싶다.
-- 포기하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을 때도 있었을 것 같다.
▲ 인지도가 그리 높지 않았던 2007년에 모교인 경희대에서 교수직을 제의받았을 때 상당히 고민을 했다. 하지만, 내가 누구를 매일 가르칠 만큼 자격이 있나 싶었고, 작가로서 (성공의)문이 바로 앞에 열려 있는 듯한 시점에 안정적인 직장을 위해 작품 활동을 접고 귀국하는 게 내키지 않았다. 결국 이곳에 남았고, 올바른 선택이었던 것 같다.
-- 서양 작가들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독창적인 작품 세계를 일궜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 이곳에 살면서 한국인임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다. 지나가다가 사람들이 일본어로 인사하면 일부러 쫓아가서 한국인이라고 알려준다. 지금이야 과학기술 강국이 되고, 경제도 발전해 한국을 많이 알고 있지만, 과거에 이곳 사람들이 한국을 잘 모를 때 예술가로서 한국이라는 나라도 있다는 것을 알리는 것도 내 작은 사명이라 생각했다. 내 작품에 자연스럽게 반영돼 있는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과 무의식이 오히려 이곳에서 특별한 관심과 인정을 받는 원동력이 됐다고 확신한다.
-- 돌가루가 날리는 작업실에서 하루 종일 작업하는 게 지겨울 때는 없는지.
▲ 처음 15년 정도는 새벽 5시에 작업실에 가서 저녁 8∼9시까지 하루 15시간 돌과 씨름했다. 이름이 어느 정도 알려지기 전까지는 가족의 생계를 걱정할 만큼 막막하고, 답답한 순간도 물론 있었다. 그렇지만 차가운 돌에 생명을 불어넣는 작업에서 본질적인 기쁨을 느꼈기 때문에, 눈을 뜨면 작업실로 향하고, 어둠이 깔리면 집에 돌아오는 반복적인 일상에서 행복감을 느낄 수 있었던 것 같다. 돌을 깨고 균열을 내 막힌 것을 분출시키는 작업 역시 나 자신을 해방시키는 행위이기도 했다. 돌이켜보면 집에 돌아오면 작품이 궁금해 빨리 작업실에 나가고 싶을 만큼 조각에 미쳐 살았던 시절이었다.
-- 조각은 다른 예술 분야보다 육체적으로도 힘든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어려움은 없나.
▲ 항상 귀마개와 마스크를 쓴 뒤 작업실에 들어간다. 젊었을 때에는 귀마개를 하지 않고, 돌을 쪼는 소리를 직접 들으면서 작업을 했는데, 청력이 많이 상할 수밖에 없어 어쩔 수 없이 귀마개를 한다. 돌가루를 빨아들이는 기계를 특수 제작해 작업실에 놓았지만, 그걸로도 막을 수 없는 미세 먼지가 있어 마스크도 필수다. 눈으로 뾰족한 돌가루가 튀어 각막이 상하는 것 역시 예삿일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조각가로서 감당해야 할 숙명이자, 훈장으로 여기고 있다.
-- 대리석과 화강석으로만 작업을 하는데, 다른 재료를 쓸 계획은 없는지.
▲ 과거에는 청동도 사용했었는데, 돌로 작업할 때와 같은 생명력이 느껴지지 않아 잘 안 쓰게 됐다. 물론 청동으로 작업하면 무한 복제가 가능해 돈을 버는 데는 더 낫겠지만, 당분간은 계속 대리석과 화강석으로 작품을 만들 계획이다.
ykhyun14@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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